“바실리 카멘스키는 러시아의 유명한 미래주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여러 아방가르드 미술 전시에 활발히 참여했습니다…”
낮고도 차분한 목소리가 녹음실을 채웠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사르르 눈이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차가운 기운을 온기가 감싸는 듯했다. 혹한 속에서 피어난 러시아 예술의 정취를 닮은 듯한 설명이었다.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스튜디오에서 이뤄진 배우 이제훈의 오디오 가이드 녹음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개막(31일)을 더욱 기대하게 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은 러시아 혁명 전야 일세를 풍미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 49인의 그림 75점을 선보인다.
녹음은 순조로웠다. 이제훈은 간혹 ‘예술 운동’을 ‘예술 활동’으로 잘못 표현하는 식의 작은 실수가 있었으나 금세 교정해 녹음을 해나갔다. 프세볼로트 울리야노프, 미하일 라리오노프, 표트르 콘찰롭스키, 바실리 로즈데스벤스키 등 ‘프’나 ‘키’로 끝나는, 한국인이라면 입에 쉬 붙지 않을 러시아 작가 이름들을 거침없이 읽어 내려 갔다. 연기 경력 14년의 관록이 녹음 과정에서 드러났다. 작은 고비가 있긴 했다. 여성 작가 알렉브티나 모르드비노바 이름 앞에서 혀가 서너 차례 꼬였다. 이제훈은 껄껄 웃으면서 “연습 좀 하고 (녹음)할게요”라고 말한 후 ‘알렉브티나 모르드비노바’를 여러 차례 반복해 말했다. 이제훈은 녹음을 마친 후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들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간이어서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러시아 대표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을 많이 봤는데, 그와 한 시대를 이끈 화가들의 작품을 오디오 가이드 녹음을 앞두고 접한 후 너무 놀랐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알 수도 있었고요.”
이제훈은 미술 애호가다. 해외 어느 도시를 가든 미술관에 꼭 들러 그림을 감상한다. tvN 예능 프로그램 ‘트래블러’(2019)를 통해 동료 배우 류준열과 쿠바 여행을 할 때도 미술관부터 찾았다. 이제훈은 “미술에 대해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어떤 감성, 표현의 다양성들을 보면서 뭔가 느끼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 느낌을 통해서 배우라는 일의 영역에서 영감을 얻기 바라는데 분명 감성적으로 제 표현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항상 작품이 끝나면 뭔가 쏟아냈기 때문에 무언가 채울 것이 필요한데,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보면서 안을 채워 가는 굉장히 좋은 양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특히 최근 영화 연출에 입문하면서 그림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다. 그는 제작과 연출을 겸한 옴니버스 영화 ‘언프레임드’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왓챠를 통해 지난 8일 공개했다. 동료 배우 박정민, 손석구, 최희서와 함께 단편영화 1편씩을 연출해 하나로 묶었다. 이제훈이 메가폰을 잡은 ‘블루 해피니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에 빠져 있는 취준생(정해인)의 사연을 담고 있다. 이제훈은 “감독은 화면의 구성, 사물의 배치, 인물들의 움직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림을 볼 때 예전보다 공간감과 깊이를 어떻게 화면과 연관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제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여파로)2년 가까이 해외 나가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또 국내 전시들을 통해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으니까 너무 감사하고 소중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보고 싶은 작품을 묻자 “카지미르 말레비치 작가의 작품”을 꼽으면서 곧바로 “올가 로자노바 작품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비구상적인 그림 속 조화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다양하게 겹쳐진 사물들의 위치와 색감은 제가 앞으로 만들 영화에 대해 좀 더 다채로운 영향을 줄 듯도 해요. 세르게이 센킨,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그림도 너무 보고 싶네요. 이런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어 기대가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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