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분광학과 광기술 분야를 연구하는 고재현 교수가 일상 생활의 다양한 현상과 과학계의 최신 발견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알기 쉽게 조망합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 중 '눈먼 자들의 도시'란 소설이 있다. 소설은 한 도시의 주민들이 갑자기 집단 실명에 걸리는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소설은 인간의 감각 중 시각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시각은 인간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얻는 주된 수단이기 때문에 집단 실명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소설의 구도는 자연스럽다.
만약 우리에게 시각이 사라진다면 외부의 정보를 어떻게 취할까?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 등 다른 모든 감각을 동원해 주변을 파악하며 생존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 시각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동물들이 처하는 상황이다. 그들이 정보를 얻는 또 하나의 통로는 바닥과 같은 물체를 통해 전달되는 진동이다. 일부 곤충들은 딛고 선 식물을 진동시켜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어떤 절지 동물은 이를 적극적인 구애에 활용한다. 이들 사이에 전달되는 진동을 교란시켜 해충의 번식을 억제하려는 연구도 있다.
그런데 진동으로 세상을 느끼며 이를 이용해 살아가는 생물의 선두 주자는 단연코 거미일 듯싶다. 시각이 그리 좋지 않은 거미는 자신이 손수 만든 거미줄에 터를 잡고 먹이를 기다린다. 거미줄 네트워크는 먹이를 잡는 덫일 뿐 아니라 걸린 먹이가 만드는 진동을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방사형과 원형으로 얽히고설킨 거미줄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크기와 차이를 이용해 거미는 먹이까지의 거리와 방향을 가늠한다. 게다가 진동의 차이를 구분해서 먹이가 걸린 것인지 바람에 의한 진동인지 아니면 구애를 벌이는 다른 거미의 접근인지 파악할 수 있다.
거미줄을 살펴보면 굵기나 강도, 점도가 다른 다양한 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질의 강도와 밀도 차이는 이를 통해 전달되는 진동의 속도를 결정한다. 그런데 기타와 같은 현악기를 다뤄 본 이들에겐 친숙한 사실이지만, 줄에 걸린 힘(장력)과 굵기 그리고 길이에 의해 줄의 고유한 진동 방식이 결정되고, 이것이 줄의 진동이 만드는 음의 높낮이를 결정한다. 거미줄을 이루는 다양한 실 역시 힘을 받으면 그에 걸맞은 고유 진동수로 흔들린다. 인간의 청각이 엄청 좋다면 거미줄 옆에 서서 다양한 원인으로 흔들리는 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구현해 음악으로 탈바꿈시킨 연구자들이 있다.
몇 년 전 MIT의 연구자들은 레이저 스캐너를 이용해 거미줄의 복잡한 모양을 복제, 이를 3차원의 정밀한 모형으로 구축한 적이 있다. 이들은 예술가와의 협업으로 거미줄의 진동을 음악으로 변조하는 작업을 수행, 올해 그 결과를 미국화학회에서 발표했다. 이를 위해 거미줄의 3차원 모형을 구성하는 각 가닥에 줄의 특성에 맞는 고유 진동수가 부여됐다. 흡사 서로 다른 굵기와 길이를 가진 기타줄이 3차원 공간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듯이 말이다. 이처럼 거미줄의 구조를 스캔해 악기로 변환하면 거미줄의 진동은 음악이 된다.
물론 거미줄의 교향악은 우리에게 익숙한 화음이나 친숙한 멜로디는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진동의 세계를 살아가는 거미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거미가 거미줄을 만드는 과정, 걸린 먹이를 감지하고 다가가는 과정, 상대방의 구애 행동에 반응하는 과정 등에 동반되는 거미줄의 다양한 진동이 음악으로 재탄생하며 거미란 곤충의 삶을 간접 체험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
약 4억 년 전에 진화의 한 분기점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현재 5만 종에 가까운 다양성을 가진 거미는 진정한 의미에서 햅틱(haptic) 곤충이라 불릴 만하다. 위와 같은 연구가 더 진전되면 언젠가는 거미줄의 진동을 활용해 거미와 대화를 나누게 될지도 모르겠다.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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