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나? 입대 후 훈련소에서 처음 맞는 정신 교육 시간. 훈련병들 앞에서 한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대장이 물었다. 특전사령부에서 근무했다며 자신의 화려한 군경력을 소개한 이후에 나온 질문이었다. 앞쪽에 앉아 있던 훈련병 몇몇이 눈치껏 아무 이름이나 던졌다. 몇 번의 스무고개가 끝난 후, 중대장이 자랑스러운 어조로 답을 말했다. 다 틀렸다. 내가 존경하는 분은 전두환 장군이시다.
그 말을 듣고 나를 비롯한 훈련병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을 것이다. 훈련병들은 표정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군대는 이런 상식이 통용되는 곳이구나. 중대장은 87년도 6월이 정말 괴로웠다며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나 혼자서라도 M60 기관총 들고 나가서 그 새끼들 다 쓸어버리고 싶었어. 그는 주어가 없는 말을 덧붙였다. 광주에서처럼 그렇게 과감하게 했어야 했는데.
8월 한여름이었고, 1996년이었다. 나는 훈련소 바깥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고, 왜 중대장이 저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퍼즐은 몇 달 후 자대 배치를 받고 훈련소 기간 중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풀렸다. 그해 여름 8월, 전두환은 내란·반란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학살에 대한 죄가 아니라.
2019년 5·18을 앞둔 어느 날. 학교 구내식당을 나오던 나는 확성기에서 퍼져 나오는 남자의 욕설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전남대 후문 앞으로 몰려온 극우 단체와 유튜버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었다. 확성기 남자는 대통령 이름과 욕설을 연결해 구호처럼 외쳤다. 그러다 남자는 갑자기 자신처럼 대통령에게 쌍욕을 해보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자 해봐, 해보라니까. 그들은 다시 나타난 계엄군이었다. 어지러운 확성기의 소음 속에서 나는 1996년의 여름을 떠올렸다. 20년도 훨씬 더 지났건만, 왜 이런 모욕은 끝나지 않는가?
왜 이런 모욕은 끝나지 않는가? 얼마 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드라마 '지옥'을 보면서 확인했다.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천사로 불리는 존재에게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고, 해당 시간이 되면 지옥에서 온 괴생물체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당한다. 통제할 수 없는 초자연적 재난 앞에서 사회는 혼돈에 빠진다. 그러자 사이비 종교 단체는 신의 심판이라는 해석틀로 재난을 해석해 혼돈을 정리하고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다. 그렇게 희생자는 천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 되어 사회로부터 단죄당하고, 그 가족들도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다. 책임을 물어야 할 가해자는 지옥으로 증발하고, 대신 희생자를 끊임없이 가해하는 세상. 그렇게 지옥은 저세상이 아닌 이 땅 위에 실현된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폭력 또는 국가의 무능과 부재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도 드라마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이 해석틀에서 희생자는 희생자가 아니다. 오히려 희생자는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사람, 또는 스스로의 실수로 재앙을 자처한 사람으로 재구성된다. 그렇게 희생자들은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4·3이 그랬고, 5·18이 그랬고, 세월호가 그랬고, 수많은 산업재해가 그랬고,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범죄가 그랬다. 더 나아가 이 해석틀은 희생자들이 진짜 희생자인지 의심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한 사회의 상식, 즉 공통의 감각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붕괴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붕괴가 '지금 여기'의 모습임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학살자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두고 한 시대가 끝났다고 평하는 이도 있었고, 반성하고 진정으로 사과함으로써 용서받을 기회를 놓쳤다며 한탄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살자에 대한 말들 속에서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성? 사과와 용서?
무조건적인 용서도 가능하다지만 용서는 사과를 전제로 하고, 사과는 반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반성은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멈추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야만 가능하다. 여기까지 쓰고, 사과하기와 용서하기가 진정으로 성립되는 조건들을 따져보려다 나는 이내 그만둔다. 학살자와 관련해서는 반성, 사과, 용서, 화해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네 단어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 그는 죽는 순간까지 가해를 멈추지 않은 쉬지 않는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지옥'에서 사이비 교주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진실을 은폐함으로써 자신의 교리를 완성시킨 것처럼, 학살자는 마지막까지 가해자로 남음으로써 그가 기획하고 만든 지옥, 일그러진 상식의 체계를 완성시켰다. 가해자가 희생자가 되고 희생자가 가해자가 되는 그 일그러진 상식의 세계에서 용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학살자가 은폐한 5·18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들은 이 망가진 상식의 세계를 복원하려는 시도, 온전한 공통의 감각을 회복하여 용서가 가능한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비웃듯이 학살자에게도 '공적'이 있다고 논함으로써 그나마 회복된 우리 사회의 공통의 감각을 다시 일그러뜨리는 이들이 있다. 대선 후보라는 이들이다. 대선 후보라는 딱지가 아무 말 자격증은 아닐 텐데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는 광주가 학살자를 용서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까지 한다. 용서라는 행위가 강권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기로 하자. 그런데 의무라니. 그 의무를 지키지 못한 희생자들은 이제 학살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걸까?
온전한 공통의 감각이란 '그는 잘한 일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공통의 감각이란 가해자를 가해자라고, 학살자를 학살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런 상식 위에서만 겨우, 간신히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라는 이들은 그나마 회복되고 있는 우리들의 공통의 감각을 다시 혼란 속으로 밀어 넣으며 희생자를 끊임없이 가해하는 모욕의 체계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다시 1996년의 여름밤. 당직사관은 불침번 보고를 하는 내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기 앞에서 머리를 박게 만들었다. 그때 당직사관이 듣던 라디오 음악 방송에서 5·18을 다룬 영화 '꽃잎'의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꽃잎이 지고 또 질 때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속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전두환을 존경한다던 중대장의 눈빛과 입대 전 극장의 스크린으로 본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 찔끔 눈물이 났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2021년 오늘, 나는 생각해본다. 우리는 그 세계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전두환이 만든 그 지옥, 용서가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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