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전영훈 신경외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2년, 신경외과 수련을 처음 시작했던 그 당시엔 '100일 당직'이라는 관행이 있었다. 꼼짝없이 병원에 묶인 상황에서,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핸드폰뿐이었다. 그런데 당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응급환자 콜을 받고 8층에서 1층 응급실까지 급히 뛰어 내려가던 중에 난간에 부딪히며 그만 핸드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나는 졸지에 가족, 지인들과 연락두절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 병원 직원이 나를 다급히 찾아와 말했다.
"댁에서 선생님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병원으로 전화가 왔는데요. 아버님께서 위독하신 거 같습니다. 저희가 일단 구급차를 댁으로 보냈습니다."
병원에서 보내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하신 아버지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지만 곧 심정지가 왔고, 동료들과 함께 필사적인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음에도 결국 황망히 돌아가시고 말았다.
내게 연락이 되지 않아 흘렀을 시간, 그 때문에 아버지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은 아닐까. 부서진 핸드폰과 그 모든 상황들이 내겐 회한이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력하게 떠나보낸 상실감과 자책이 날 휘감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신경외과 레지던트의 살인적인 업무량과 육체의 피로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비현실적인 상실감을 차츰 무디게 만들어주었고, 난 그냥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브리핑 후 잠시 숨을 돌리고 병원 1층 로비를 걷고 있었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슬픔에 젖고 피곤에 절었던 내 표정은 무척이나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밝은 얼굴로 걸어오던 5살 정도 여자아이가 있었다. 예쁜 얼굴에 나있는 상처자국이 마음 아프다고 느끼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그 아이도 나를 발견하곤, 너무도 예쁜 미소와 함께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뒤에 따라오며 나를 향해 웃는 아이의 부모님을 보고는, 이 아이가 중환자실에 의식불명으로 누워있던 그 아가였음을 이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후였던 것 같다. 응급실에 피투성이가 된 여자아이가 실려 왔다. 교통사고였는데 뇌좌상과 뇌부종, 안면골절이 복합되어 있었고 의식이 없었다. 부모님들은 눈물 범벅이었다. 그 부모님의 처참했던 심정은 아이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촌각을 다투던 아이의 상태에 응급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응급실 간호사들은 아이의 생체징후를 체크했고, 나는 호흡 확보를 위한 기관삽관을 최우선으로 진행했다. 응급실에서 바이탈을 잡은 후 중환자실로 옮겨 뇌압 강하를 위한 치료가 시작되었다. 뇌압이 성공적으로 조절되지 못하면 뇌 연수에 있는 호흡과 심장박동 중추가 손상되어 결국 심장이 멈추게 된다. 병상에 누워 의식조차 없는 이 조그만 아이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아이는 계속 의식을 찾지 못했고. 나는 아이가 너무도 안쓰럽고 신경 쓰여 밤에도, 새벽에도 중환자실을 지키며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어느 밤 아이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거리는 듯 보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난 ‘손을 잡아 볼래?’라고 말을 건넸다. 순간 그 작은 손에서 미약하지만 확실한 악력이 전해져왔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었다. 난 서둘러 기관 삽관을 제거했다. 그리곤 아이 얼굴에 숨죽이며 귀를 기울이자, 아이의 들릴락말락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배..고...파..'
난 눈물이 났다. 내가 그 아이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찼고 한없이 감사했다. 그날 밤 아이가 깨어나던 순간을 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중환자실에서 충분히 기운과 안정을 찾은 아이는 이후 성형외과 주치의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당시 아이 얼굴이 외상에 의해 심하게 부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그 얼굴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아이가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을 때 몰라봤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우연히 다시 만난 그 아이가 나를 알아보고 안아주었을 때, 순간 내 마음을 휘감던 따뜻했던 느낌, 그건 내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걸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쓰러져있던 나의 마음을 그 아이가 다정하게 안아 일으켜 세워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슬픈 기억으로 괴로웠던 100일 당직 속에서 나는 그렇게 신경외과의사로 성장해 나갔던 거 같다. 이후로도 환자들을 보며 수많은 생과 사의 경계를 마주했지만, 신경외과 의사 초년 시절 아프고 간절한 마음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부어 돌봤던 그 아이의 기억은 나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20여 년 의사생활 동안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이 작고 따뜻했던 포옹의 기억이 나를 격려해주곤 했다.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그 예쁜 미소를 어른이 되어서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껏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가야. 너는 내가 널 지켜주었다고 달려와 안아주었겠지만, 사실은 네가 나를 일으켜 세워 준 거란다."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분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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