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선전포고 기념일에 고위급 불참
"일본관계 고려" 이유...납득 안가
국가자존심 지켜야 유연한 외교 가능
지난 10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생존 지사들로 조직된 광복군동지회를 계승해 10월에 출범한 광복군기념사업회는 서욱 국방부장관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초청해 축사를 부탁했으나 두 사람 모두 불참했다. 보훈처에서는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보냈고, 국방부에서는 군악대와 중창단을 보내는 성의를 보이긴 했다. 의의와 무관하게 사설 단체인 한 기념사업회의 행사에 장관이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국방부가 알려온 장관의 불참 이유는 귀를 의심케 한다. "일본과의 관계 등"을 이유로 불참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 정부가 언제부터 일본과의 관계를 그렇게 심각하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걸 주저할 정도로 고려했나?
따지고 보면 한일과거사 갈등에서 이 정부는 갈피를 못 잡고 헤매 왔다. 2015년 한일 외교부장관이 위안부합의를 발표하자 문재인 당대표가 지휘하는 더불어민주당은 "굴욕적 합의", "외교대참사"라 질타하면서 합의가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아 무효라 주장했다. 출범 첫해인 2017년 문 대통령은 한일위안부합의 검토 태스크포스의 조사 결과를 청취한 후 위안부합의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고, 그것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고 말했다.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을 전액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겠다 했고, 2019년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사건이 원고 승소로 확정되고, 피고 재산의 압류가 시작되자 일본은 청구권협정 위반을 주장하면서 중재 회부를 요구하다가 핵심 반도체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문 대통령은 3권분립의 원칙을 내세워 정부의 부작위를 정당화하면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종료를 선언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러나 죽창가를 배경음악으로 한 강경 대응은 나라의 품격을 형편없이 만드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의 압박 속에 지소미아 종료를 유예해야 했고,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도 얻지 못한 채,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가져오라는 가해국의 갑질에 이 방안 저 방안을 들고 가는 을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더니 일본국을 피고로 하는 위안부 피해자의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하자 문 대통령은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그동안 위안부합의가 양국 정부 간 "공식 합의"였음을 인정하는 알쏭달쏭한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토대로 해법을 모색하겠다고까지 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들어 대일선전포고 80주년 기념식 참석을 거부한 국방부장관의 태도는 대통령의 무원칙한 입장을 눈치껏 따라가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살살이같이 군다고 해서 한일관계가 좋아질 리 없다. "국제적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 민족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유연한 외교적 자세는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에서 나온다.
피고들의 재산 압류와 현금화가 정치·외교적으로 불가능함이 밝혀졌을 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자 소송에서 두 개의 모순된 판결이 나왔고,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에 서도 대법원 판결에 배치되는 하급심 판결이 나오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적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정치적 협의는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 앞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이뤄져야 한다. 국민과 피해자들이 납득하기 위해서는 정부 스스로 역사적 기억을 소중히 하고 국격을 지키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대일선전포고 기념식에 국민의힘 선대위 국방혁신위원회 위원장이 참석했고, 19일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에 여야 대선 후보들이 참석한 것은 그래서 보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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