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부문]'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역자 강병철
의사이면서 직업적으로 번역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출판계의 구멍을 메우는 책을 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있는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거기서 저도 돌 하나를 놓는 겁니다. 담에서 새는 물을 막는 돌 하나죠. 저만이 놓을 수 있는 돌이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강병철 꿈꿀자유 출판사 대표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를 한국어로 옮겨 제62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수상자가 된 강병철 대표는 손해를 보지 않으면 다행인 의학서적을 꾸준히 번역하고 출판해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처럼 비과학적 의학서적이 넘쳐나는 국내 출판시장에 과학적이면서 비전문가도 읽을 수 있는 책을 공급하기로 결심했다는 의지다. 강 대표를 15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나봤다.
잘나가던 의사가 번역가 된 이유는
강 대표는 2000년대 중반 제주도에서 소아과를 운영하던 잘나가는 개원의였다. 그가 병원을 접고 번역가로 변신한 데는 남다른 계기가 있다. 큰아이가 정신질환을 진단받았는데 국내에서는 환자와 가족이 믿고 따를 만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강 대표는 해외에서 정신질환자 가족을 위한 안내서를 찾아내 번역하면서 본격적으로 출판업에 뛰어든다. 2013년에는 꿈꿀자유를 세웠다.
구역질이 날 때까지 고치며 번역
그런 그에게도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번역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자폐증의 발견부터 자폐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기까지 자폐의 역사가 864쪽에 걸쳐서 펼쳐진다. 강 대표는 “그렇게 두꺼운 책을 누가 살까 싶었지만 자폐인 부모님들이 모금활동에 많이 참여해주셔서 책을 낼 수 있었다”면서 “처음 번역한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여섯 차례 탈고했는데 다섯 번째부터는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라면서 웃었다.
수상작은 문장이 소설처럼 매끄럽다. 강 대표는 8개월이 걸릴 분량을 1년 4개월에 걸쳐서 번역했다면서 “원문에서는 저자들의 독특한 말투가 너무 많이 들어있었다. ‘시작했다’로 끝나는 문장이 수백개여서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고 설명했다. 양현숙 편집장은 물론이고 강 대표의 아내도 함께 어색한 부분을 찾았다. 강 대표는 “제가 직업 번역가가 되고 15년이 흘렀는데 이 책 번역에 시간이 제일 많이 걸렸다”고 돌아봤다.
정신장애와 정신질환, 의학으로만 접근하면 안돼
강 대표는 정신장애와 정신질환을 의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해서는 당사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과 당사자가 살기 편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강 대표는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통계에 잡히는) 장애인의 숫자가 늘어난다. 한국은 등록 장애인 비율이 인구의 5% 정도인데 북미는 10% 이상, 스칸디나비아는 20% 이상이다. 불편한 사람을 장애로 규정하고 좀 더 신경 쓰자는 컨센서스(합의)가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강 대표는 “(수상작은) 자폐라는 질병을 발견하고 정의하고 대처한 과정을 다룬 책인데 그 과정을 알면 자폐를 의학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공허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설명했다. 강 대표는 “의학적으로는 문제 행동을 규정하고 장내 세균총이 문제다, 뇌에 화학물질이 잘못돼 있으니까 미니 브레인을 만들어서 실험해보자 이런 연구를 열심히 하지만 자폐의 본질하고는 많이 떨어져 있는 이야기”라면서 “모든 과학적 현상은 인간과 사회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치료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
의학적 해결책을 찾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와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 무언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강 대표는 “강연을 다니면서 자폐인 부모들을 많이 만난다. 그들에게 자폐를 고칠 수 있는 치료법 개발된다면 받으시겠냐고 물으면 대부분 ‘할 거 같다’라고 대답한다. 이후에 자폐를 예방하는 산전 검사가 나온다면 받겠냐고 물어보면 (인공임신중절과 연결되기 때문에) 생각이 복잡해진다”라고 덧붙였다.
결국은 불편한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강 대표는 “자폐는 스펙트럼 장애라고 부른다. 자폐의 다양한 경향 가운데 어떤 것은 나도 가졌고, 기자도 가졌을 것이다”라면서 “장애를 정하는는 기준은 자의적인데(사회적으로 결정되는데) 이 기준을 옮기면 장애인이었던 사람들이 비장애인이 되는 것.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결국은 정책을 바꿔야 하는데 그것은 다수의 의지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원망보다 연대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그렇다면 다수의 의지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강 대표는 적대적 투쟁보다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진국에 비해서 열악한 현실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장애계나 여성계 등이 급진적이고 공격적으로 주장을 펼쳐왔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가가야 타인을 설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강 대표는 “지금처럼 신체장애인, 정신장애인, 발달장애인, 자폐장애인 이렇게 나눠져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도 자폐인들이 다른 장애인들과 연대해서 승리했다. 여기에 노인도 언젠가는 (신체적 기능이 떨어져서) 장애인이 되는데 그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인구의 과반수가 넘는다. 연대할 수만 있으면 문제를 더 좋은 쪽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대표는 “장애인한테 좀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해 달라, 사회가 편견을 갖지 말아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말이고, 우리가 옳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게 주장하면 된다. 다만 공격적으로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할 필요는 없다. 자기도 상처받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기보다는 연대하면서 절대로 굽히지 않고 계속 이야기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많이 본다
인터뷰 말미에 강 대표는 기자에게 “숲에서 경치를 가장 잘 보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대답을 못하는 기자에게 강 대표는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숲 바닥에 누우면 시야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진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나무들이 꼭대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강 대표는 장애인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덧붙였다.
“장애를 가진 것은 굉장히 힘들고 어렵죠.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바꾸길 원하는데 그게 갑자기 되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세상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고 누구를 증오하고 원망할 것은 아닙니다.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미 굉장히 낮은 곳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래서 소위 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 사회의 평균이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어요. 저는 그게 장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이해심을 가지고,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아마 우리한테 더 있을 거라고 믿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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