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당선자 남궁순금
권정생 선생의 작디작은 방을 가 본적이 있다. 서재이면서 침실이고 부엌이었다. 아프기 좋은 방이라며 선생은 만족하셨다. 쥐들도 함께 한 그 방에 내가 점령군처럼 서 있다는 생각에 얼른 그곳에서 빠져나왔던 기억이 명료하다. 내 방은 크고 멀쩡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빈 방이었다. 고백하자면, 국민학교 4학년 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반공소년 이승복 추모 웅변대회,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남자애들과 싸우기, 그리고 갑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이 그 무렵의 나를 만들었을까. 그때의 내가 생각한 ‘작가’를 지금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49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누구였을까.
햇살 좋은 언덕에 앉아 졸거나 방안에 틀어박혀 ‘문 밖’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게으르게 살고 싶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세상의 끈과 연결 없인 불가능했다. 나와 같거나 다른 여성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사내부부란 이유로 여성들이 부당해고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아이들이 학교급식이나 성적으로 차별받지 않아야하고, 골프장건설로 등 굽은 노인들이 동네에서 쫓겨나서도 안 되며 서로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야한다고, 오랜 시간 길 위에 서 있었다. 법과 제도를 만들고 의식을 바꿔내는 성과도 없지 않았지만, ‘열한 살의 나’를 외면한 채였다. 운동화 끈만 고쳐 매지 말고 필드로 나가라고 채근하는 우군들에게도 늘 빚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었다.
비워두었던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 버려둔 내가 아직 남아있었다. 우군들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남편과 아들에게, 주치의 오라버니와 무한 격려자 언니와 동생들에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키워주신 엄마, 아버지께 늦고도 늦었지만 깊은 고마움과 사랑을 전한다. ‘인생은 60부터’란 말이 당신에게 해당된다고 길을 터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나이로 차별하지 않는 한국일보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담담하고 긴장되고 설레고 두렵지만 이미 첫 수를 두었다. 마른 땅에 나무 한 그루 심는 마음으로, 진솔하게 이 길을 가고 싶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졸업
△MBC 교양제작국 구성작가
△춘천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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