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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 속 할머니는 마녀라서 살해당했을까

입력
2022.01.01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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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마녀사냥과 열녀숭배의 공통점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909년 아서 락캄(Arthur Rackham)이 그린 '헨젤과 그레텔'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1909년 아서 락캄(Arthur Rackham)이 그린 '헨젤과 그레텔'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헨젤과 그레텔'을 읽다보면 이상했다. 숲속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화덕을 왜 갖고 있었을까? 그렇게나 많은 빵과 과자는 왜 구워 놓았을까?

서양 중세의 가정집에는 빵 굽는 화덕이 없었다. 난로를 겸하는 작은 화덕만 있었다. 집에 개인 화덕을 설치하는 것은 금지였기에 장원에 사는 사람들은 요금을 내고 영주 소유의 공용 화덕을 이용해야 했다. 이를 '빵 구이 화덕 사용 강제권'이라 부른다. 화덕 사용료를 걷는 영주가 없는 도시에서도 사람들은 집에 개인 화덕을 설치하지 않았다. 화재 위험 때문이다. 게다가 화덕 설치 비용은 비쌌다. 이런 이유로, 빵은 빵가게에서 사서 먹었다. 돈을 내고 구워달라며 반죽을 맡기기도 했다.

그런데 숲속 마녀의 집에 커다란 빵구이 화덕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마녀는 제빵사? 배고픈 아이들이 벽 쪽 선반이나 창가 탁자에 방금 구워낸 빵과 과자를 식히려고 늘어놓은 것을 본다면 빵과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발견했다고 생각할 만하다. 만약 제빵사였다면 왜 도시에서 빵가게를 내지 않고 숲속에서 혼자 빵을 굽고 있었을까? 왜 제빵사 할머니는 마녀로 여겨졌을까?

돈과 권력, 정치에서 여성 차단하기

렘브란트는 1662년 직물 제조업자들로 구성된 길드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렘브란트는 1662년 직물 제조업자들로 구성된 길드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12, 13세기 이후 유럽 도시의 빵집은 동업 조합인 길드를 결성한다. 제빵사는 도제와 직인을 두고 일하는 장인이었다. 길드 조합원만이 그 도시에서 빵을 구워서 팔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도시민은 반드시 그 도시의 길드 조합원이 만든 빵을 사야 했다. 독점적 위치에 있으니 제빵사들이 횡포를 부리기 쉽다. 이에 시 당국은 가격 상한선을 정해 놓고 빵의 품질을 검사했다. 그러자 제빵사들은 빵값은 그대로 두고 곡식 가격의 변동에 따라 중량을 다르게 해서 빵을 만들어 팔았다. 시 당국이 중량을 감시하면 모래와 재를 밀가루에 섞어 빵을 구웠다. 시 당국의 엄격한 규제를 피하기 위해 아예 시의 공직을 차지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덴마크 속담이 있다. "시장이 제빵사인 곳에서는 빵이 언제나 작다."

도시의 길드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조합 회원 수를 관리했다. 여성이 가입하는 것에 제한을 두거나 아예 가입을 거부했다. 여성은 길드의 정식 멤버가 될 수 없었다. 장인의 아내는 부인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지만 신분은 장인보다 아래였다. 남편 사망 후에야 남편이 가졌던 길드에서의 신분과 직무를 계승할 수 있었다. 몇 안 되지만 여성이 지배하는 길드도 있었는데 직물업이나 수예 등 주로 여성이 일하는 업종에 한정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길드도 남성들에게 종속되었다. 노동은 여성이 했지만 길드 행정 관리는 남성이 맡게 한 것이다. 여성이 길드를 통해 도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정치 참여는 막았어도 여성의 노동력은 늘 필요했다. 평소는 물론,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망자가 늘어 노동력이 부족해지면 길드는 여성에게도 일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여성은 도제 과정을 마쳐도 장인이 될 수 없었다. 남성들은 '불완전한 존재인 여성은 손님을 속이기에 장인으로 부적당하다'며 여성을 길드에서 배제하고 비정규직으로만 고용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한 직종에 오래 일해서 경험을 쌓아 전문 장인이 될 동안 여성들은 이일 저일 시키는 대로 저임금 노동을 했다.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독립적인 여성 길드도 있었지만, 남성들은 이들의 존재가 시 당국의 남성적 권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했기에 비방을 일삼고 조직의 성장을 방해했다.

마녀가 된 독신 할머니, 그리고 화형

1842년 그려진 헨젤과 그레텔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1842년 그려진 헨젤과 그레텔 삽화. 위키피디아 캡처


그렇다면, '헨젤과 그레텔'의 할머니는 독신 여성 기술자여서 제빵사 길드에 가입할 수 없었기에 도시를 나와 숲속에서 빵을 구운 것은 아니었을까? 도시의 제빵사들이 밀가루의 함량을 속이고 빵값을 비싸게 받을 경우 시 당국은 도시 밖 시골 빵집을 불러 임시로 빵가게를 열게 하기도 했다. 혹시 숲속 빵집 주인 할머니는 정직한 무게로 빵을 구워 싼 값에 팔았기에 길드의 반감을 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도시 제빵사들에게 마녀로 몰려 제거당한 것은 아닐까?

지역 사회는 종교적, 경제적, 사회적 적을 마녀로 몰아 제거하곤 했다. 화형당한 마녀의 재산은 몰수되어 재판관, 고문관, 사형집행인 등에게 배분되었기에 마녀 사냥은 이익이 남는 사업이었다. 그러기에 헨젤과 그레텔 남매가 마녀를 죽인 후 마녀의 집에 있던 보석을 가져가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관련 있다.

그레텔은 마녀를 화덕 속으로 밀어 넣는다. 마녀는 불에 타서 죽는다. 왜 마녀는 그렇게 죽어야 했을까? 마녀를 처형하는 방법이 화형이었기 때문에? 중세 시절 화형은 가장 중한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하는 방식이었다. 마법을 쓰거나 이단이거나 주인 살해범이면 화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여성은 절도로도 화형을 당했다. 같은 죄를 지었을 경우 남성들은 교수형을 당했다. 형벌은 성차별적이었다. '헨젤과 그레텔'의 할머니가 불에 타 죽었던 이유는 마녀로 몰렸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마녀들의 연희'(1820~1823년). 위키피디아 캡처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마녀들의 연희'(1820~1823년). 위키피디아 캡처


르네상스와 시작된 분업과 차별

11, 12세기, 서유럽 세계에 큰 변화가 생긴다. 농지 개간과 농업 기술 발전으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한다. 수공업이 발달하여 도시가 성장한다. 중세를 구성하던 세 신분, 사제와 기사와 농민 외에 도시 상인과 수공업자 계급이 등장했다. 대의 민주주의와 효율적 정부 체제의 기초도 만들어졌다. 학문이 부활하고 문화가 꽃핀 이 시기를 12세기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2세기부터 여성의 지위는 더욱 낮아진다.

이전 시대까지 여성의 역할은 중요했다. 농업 생산성이 낮은 자급자족 경제에서는 모두 생산에 참여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농사 짓고 여성은 집안일만 하는 완벽한 성별 분업이란 없었다. 여성의 노동은 낮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 후반기에 화폐 경제가 발달하여 지대의 금납화가 이루어지면서 상황이 변한다. 성별 분업과 여성 노동 차별이 시작된다. 지대 지불을 위한 잉여 생산 노동을 남성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임금을 받고 일하는 전문적 기술자들은 대부분 남성들만 고용되었다. 중세 후반기에 이미 여성들이 직업 선택과 임금에서 차별을 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성은 사회와 가정에 기여했지만 공적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금 납부 등 의무는 짊어져야 했다. 이런 점에서, 여성들이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한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늘 맞지 않는다.

가부장 밖 여성을 향한 '사냥' 또는 '숭배'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마리아 숭배의 대표적인 예다. 12세기 유럽에서는 각지에 노트르담 즉, '우리들의 성모' 성당이 건립된다. 위키피디아 캡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마리아 숭배의 대표적인 예다. 12세기 유럽에서는 각지에 노트르담 즉, '우리들의 성모' 성당이 건립된다. 위키피디아 캡처


그리스 로마와 크리스트교 문명이 기반인 서구 사회는 고통의 상자를 연 판도라와, 남성을 유혹하여 원죄를 짓게 만든 이브의 후예인 여성을 혐오했다. 12세기 들어 여성 혐오는 더욱 심해졌다. 그 증거가 12세기 르네상스의 특징 중 하나인 궁정 문학의 유행과 마리아 숭배다. 마리아 숭배를 비롯한 귀부인과 성녀 숭배의 이면에는 마녀 탄압이 있다. 여성을 성녀와 마녀로 나누어 길들이는 것은 여성 혐오의 대표적 패턴이었다.

마녀 사냥은 15~18세기에 유럽 각지와 유럽인이 이주해간 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났다. 마녀로 몰려 교회와 세속의 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사람들 중에는 남성도 있었지만 여성이 80% 이상이었다. 마녀 사냥을 여성 혐오 학살로 보는 이유다. 대규모 마녀 사냥은 1570년에서 1640년에 집중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세가 아니다. 중세에도 여성 혐오는 있었고 마녀로 몰리는 여성도 있었지만 집단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마녀 사냥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해가는 사회 불안기에 공공의 적을 만들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을 희생시킨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 마녀로 몰린 여성은 결혼을 안 했거나 사별하여 가부장의 지배 밖에 있던 사회적 약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의 마녀 사냥은 300여 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1775년, 공식적으로 마지막 마녀 사냥이 일어나고 40년 후, 독일에 전해지던 마녀 이야기와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모아 여러 차례 수정하여 '헨젤과 그레텔'이 완성된다. 이 시기, 지구 반대편 조선에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열녀 숭배가 한창이었다.

마녀로 몰아 여성을 태워 죽이든, 열녀가 되라고 자결하게 여성을 몰아가든, 기본 원리는 같다. 바로, 남성들의 이익을 위해 가부장의 통제 밖에 있는 여성들의 수를 줄이는 것. 지금 비혼주의 여성들을 '이기적인 페미니스트'라고 욕하는 이유와도 통한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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