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년기획-무기가 된 경제]
<1>중국의 폭주, 미국의 압박
공급망 점검하며 ‘바이 아메리칸’ 앞세운 미국
SK 배터리 공장…3조 투자 한미 ‘윈윈’ 상징
‘미국 노동자 우선주의’ 우방 균열 지점 우려
편집자주
경제가 국가생존을 좌우하는 시대다. 자원 무기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안보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있다. 폭주하는 건 중국이다. ‘첨단산업의 비타민’ 희토류를 움켜쥐었다. 미국은 동맹·우방을 끌어들여 핵심전략물자 조달 압박을 노골화하고 있다. 일본은 ‘식량안보’를 내세워 쌀 자급률을 높이던 경험을 되살리고 있다. 한국의 대응전략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미국 동남부 중심 도시 조지아주(州) 애틀랜타. 지난달 20일(현지시간) 하츠필드-잭슨 애틀랜타 공항에 내려 I85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정도 북동쪽으로 달려가자 소도시 커머스 이정표가 나타났다. 고속도로 출구를 빠져 나와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한국 기업 로고가 달린 공장과 건설 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SKBA(SK Battery America)’,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자회사 SK온 미국 조지아 공장이었다.
흰색 방진복으로 갈아입고 1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배터리 제조를 위해 설비 기계를 운영 중인 한국인과 미국인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2019년 착공한 1공장은 건물과 설비가 이미 완공돼 올해 초 대량생산을 앞두고 있었다. 배터리 재고 물량을 쌓아두기 위한 시험생산에 이미 돌입한 상태였다.
'착착착착' 기계 소리가 공장 안에 가득했다. 배터리 양극재와 음극재에 들어갈 원료 혼합, 성형, 절단, 진공 건조, 쌓기, 포장, 활성화 같은 단계를 거쳐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가 생산돼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5월 이곳을 직접 찾았을 정도로 관심이 쏟아졌던 현장이다.
한미 정상 주목한 조지아 SK 전기차 배터리 공장
1공장에선 총 6개의 생산 라인 중 2개를 먼저 돌리며 미국 포드자동차 전기 픽업트럭인 F150 라이트닝과 독일 폭스바겐 ID.4 모델에 들어갈 두 종류의 배터리를 만들고 있었다. 1공장 바로 옆에 건설 중인 2공장이 하반기까지 완공되면 연면적 25만㎡, 축구장 35개 크기의 공장 단지가 완성되는 것이다.
두 공장에서 1년에 생산하게 될 배터리 용량만 21.5기가와트시(GWh). 60킬로와트시(KWh) 배터리가 들어가는 전기차 35만8,000대 분량 제품을 1년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단일 규모로는 미국 최대 전기차 배터리 공장이다.
지난해 4월부터 설비 구축과 생산 지원을 위해 파견 나와 있던 SK온 생산 책임자는 “현지에서 채용한 미국인 직원을 교육, 훈련하면서 내년 초 본격적인 생산에 대비해 양산 체계를 구축 중”이라고 설명했다. 1공장에선 총 1,000명을 고용했고 2공장까지 양산체계에 돌입하면 2,600명이 일하게 된다.
중국과 헝가리에서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운영 중인 SK는 미국 조지아 공장 건설에 26억 달러(약 3조 원)를 투자했다. 또 지난 5월 포드와 전기차 배터리 합작 법인 ‘블루 오벌 에스케이(BlueOvalSK)’ 공장을 테네시와 켄터키주에 세우기로 하면서 44억5,000만 달러를 추가 투자할 계획이다.
SK만이 아니다. 삼성, 현대차, LG 등 한국 유수의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 유럽과 아시아의 주요 기업도 앞다퉈 미국 투자를 늘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는 큰 타격 없이 도약을 시작했다. 이유가 뭘까. 세계 경제안보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이처럼 전열을 재편하면서 동맹과 우방이 그 유탄을 맞고 있다.
바이든식 ‘미국 경제 우선주의’…공급망 점검부터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7년 취임한 뒤 미국이 내세웠던 대외전략 기조다. 2020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대부분 뒤집었지만 유일하게 계승 발전시킨 것이 ‘미국 경제 우선주의’다.
가장 먼저 한 작업은 핵심 품목 공급망 점검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한 달 만인 지난해 2월 ‘회복력 있고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을 목표로 주요 품목 및 산업 공급망 검토 행정명령을 내렸다. 100일 만에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대 품목 검토 결과 보고서가 나왔다. △국방 △공공보건 △정보통신기술(ICT) △에너지 △운송 △농업 및 식품 생산 등 나머지 6대 핵심 산업 공급망 리스크 점검 결과와 대응 방안은 오는 2월 중 나올 예정이다.
2020년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미국은 진단키트, 산소호흡기 같은 주요 물품은 물론 기본 물품인 마스크마저 구하지 못하는 최악의 공급난에 처했다. 또 차량용 반도체 주문과 생산이 축소됐다 갑자기 수요가 늘면서 공급이 이를 따라잡지 못해 미국의 포드, GM 등 핵심 자동차 공장 가동이 일시 중단되는 일도 벌어졌다. 미국은 제대로 된 전기차 배터리 회사도 없고, 희토류 역시 자원 부족에 관리도 엉망이었다. 중국의 준비된 공급망 옥죄기 공세에 속수무책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공급망 점검은 이 같은 미국의 허술한 산업 생태계 정책 관리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점검 결과 미국은 반도체의 경우 완제품 판매, 배터리는 원료 가공 및 제조, 희토류는 광물 매장량, 의약품은 원료와 완제품 제조에서 중국 편중도가 높고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백악관은 보고서에서 “수십 년간의 투자 부족, 경쟁 국가들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 저임금 고용 우선 정책, 민간의 단기 보상 집중 등이 미국의 산업 기반과 혁신을 잠식했다”라고 진단했다. 결국 한국 대만 일본 유럽 등 우호 국가 핵심 제조시설을 유치하고 미국 내 기업의 국내 생산 기반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단기 대응 기조를 잡았다. 핵심 우방국들에 대한 거친 ‘자원확보 압박’을 예고한 것이다.
미국의 뜻에 따라 구체적인 행동이 잇따랐다. 삼성과 SK 등이 미국 내 신규 공장 건설을 결정하고, 미국의 대표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배터리 핵심 원료인 흑연을 중국 대신 미국에서 조달하기 시작하는 등 동맹ㆍ우방국 중심 공급망 재편이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물건 우선 사야” “반도체 자료 내놔야” 대놓고 동맹 압박
이 과정에서 백악관의 압박이 두드러졌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공급망 조사를 지시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 내 투자 확대, 경쟁 심화 등에 곧바로 노출됐다. 백악관이 지난해 4월 이후 3차례나 반도체 관련 글로벌 기업을 소집해 회의를 열고, 미 상무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민감한 기업 정보 제공을 요구하는 등 우방을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미국 에너지부는 리튬전지 관련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하고, 미 무역대표부(USTR)는 '무역 기동타격대'를 구성하는 등 부처별 반격 준비도 이어지고 있다. 모두 중국의 '자원 무기화' 공세에 대응하는 차원이다.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강화도 최근 눈여겨볼 현상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경제안보전쟁 제1전략으로 앞세운 구호다. 바이 아메리칸은 연방정부가 공공 물자를 조달할 때 미국산 제품을 우선 구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바이 아메리칸법은 1933년 제정된 뒤 트럼프 행정부 들어 규정이 강화됐는데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7월 이 기준을 더 끌어올렸다. 완성품 내 미국산 부품이 55%면 가격 특혜가 주어지던 것을 60%로 상향했고 2029년에는 75%까지 올리겠다는 계획이다. 백악관 예산관리국(OMB)에 ‘메이드 인 아메리카국’을 신설하는 등 향후에도 이 기조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칼과 방패를 동시에 준비하는 것도 특징이다. 중국의 경제안보 도발에 대비하며 미국경제 기초체력도 긴박하게 다지고 있다. 주미 한국대사관이 발간한 ‘미국의 주요 대외정책 수단 바로 알기’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주요 규제 수단에는 수출통제, 대(對)중국 군산복합체 증권 투자 금지, 강제노동 제품 수입 제한, 무역법 제301조, 경제제재 등이 있다. 또 경쟁력 확대를 위해 과학기술 강화 입법(Endless Frontier Act)을 추진하는 등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연방ㆍ주정부, ‘따로 또 같이’ 경제안보 역할 분담
미국이 경제안보전쟁에서 채택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연대 전술은 ‘따로 또 같이’다. 연방정부가 정상회담과 장관급 협의를 통해 미국 내 핵심 공급망 강화에 집중한다면 주정부는 지역 일자리와 경제 살리기 차원에서 각개약진하는 식이다.
지난해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첨단ㆍ자동차용 반도체 및 중대형 배터리 △핵심제품 생산 확대를 위한 소재ㆍ부품ㆍ장비(소부장) 공급망 등에서 상호보완 투자를 촉진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미국 내 신규 파운드리(위탁 생산) 반도체 공장 건설에 170억 달러, 현대차는 미국 내 전기차 생산 및 충전 인프라 구축에 74억 달러,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내 완성차 제조사들과 합작 배터리 생산 공장 건설을 위해 14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동시에 미국 듀폰의 극자외선(EUV)용 반도체 소재 원천기술 개발연구(R&D)센터 한국 설립, 퀄컴의 중소기업 투자 확대 같은 미국 측의 한국 투자 약속도 반대급부로 제시됐다.
미 주정부 차원의 공략은 집요하고 인상적이다. SK 배터리 공장을 유치한 조지아는 20년 토지 무상임대와 3억 달러 상당의 혜택을 SK에 제공했다. 팻 윌슨 조지아주 경제개발장관은 한국일보에 “우리의 많은 인센티브 중 대단한 것은 주 차원 세금 감면”이라며 “조지아에 있는 기업을 키우거나 새로 만든다면 일자리를 만드는 데 따라 세금 혜택을 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 미국 내 80% 지역이 비행기로 2시간 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다 트럭으로도 이틀이면 화물 운송이 가능한 물류 장점, 지역 내 풍부한 대학 졸업자 노동력도 앞세웠다. 여기에 저렴한 생활비와 수도ㆍ전기요금, 미국 내 가장 낮은 노동조합 조직률도 조지아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조지아주에는 SK 외에도 기아자동차 같은 한국 기업은 물론 최근 각광 받는 전기트럭 제조 업체 리비안의 새로운 생산 공장까지 들어서고 있다. 2021 회계연도에 한국에서 유치한 투자만 19건이라고 윌슨 장관은 덧붙였다.
삼성전자의 새 파운드리 공장이 들어설 텍사스주 테일러시 역시 20년간 10억 달러 규모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여기에 미 의회에서 반도체생산촉진법이 최종 통과될 경우 법인세 감면 혜택도 투자액의 40%까지 챙길 수 있게 된다.
‘노골적인 줄 세우기’ 겉으로 피하며 압박…한계도 분명
협업을 앞세우면서 겉으로는 노골적인 줄세우기를 피하는 것도 미국의 특징이다. SK온은 전기차 배터리 4대 핵심 소재인 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전해질 소재업체와 손잡고 미국 내에 대형 클러스터를 구축 중이다. 액체 성질이라 물류 운송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는 전해질의 경우 한국의 엔켐이 아예 조지아에 함께 진출하기도 했다. SK는 생산 장비의 95%, 소재 부품의 80%를 한국 기업이나 미국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서 공급받고 있다. 양측 모두에 윈윈이 되는 방식으로 유도하는 셈이다.
다른 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배터리, 5G(5세대) 통신 등 미국 국가안보에도 민감한 분야에서 기술력을 갖춘 한국 기업에 미국의 관심이 많았고, 한국 기업의 투자 포트폴리오(분산 전략)도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기술공정 역량과 미국의 연구 능력을 합쳐 한미 기술동맹을 구축하려는 양국 정부의 이해가 일치하는 대목도 많다.
물론 바이든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미국 노동자 우선주의’로 변질돼 유럽 및 아시아 교역국과 갈등 요소가 되기도 한다. 당장 미국 전국자동차노조 소속 공장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더 큰 세제 혜택을 주면서 캐나다와 멕시코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또 중국이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주도하고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신청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미국은 미온적인 점도 아시아 국가들에게 불만 사항이다.
애덤 포슨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은 WSJ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무역정책은 미국 기업과 소비자용 수입품 가격을 올리는 식으로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며 “이는 ‘백인 남성 노동자 (중심) 산업’에는 맞지만 동맹과의 관계는 악화시키고 소비자에게는 더 비용이 많이 들게 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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