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6월항쟁의 드라마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졌다. 그의 죽음은 6월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으로 이어지며 시민적 의분으로 폭발했다. 1987년 6월항쟁의 주된 동력은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짓밟고 5공화국 헌법의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겠다고 천명한 전두환의 4월 13일 특별담화(4·13 호헌조치)에 따른 민주화 열망이었지만, 배경에는 두 국가 살인 범죄와 1985년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에 대한 국민적 분노도 깔려 있었다. 물론 항쟁 참여 단체들의 입장은 열망과 분노라는 두 어절로 모두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 위에 있었겠지만, 적어도 명분은 그러했다.
노태우 당시 여당(민주정의당) 대선후보는 6·29 선언이란 직선제 개헌 카드로 국면을 돌파하며, 분열한 야권 후보들을 누르고 그해 말 대통령에 당선됐다. 6월항쟁은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의미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야권과 재야 정치단체에는 사실상 좌절된 항쟁이었다. 노동자 농민단체의 조직적 역량과 위상이 강화됐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이 괄목할 만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밑천을 두둑히 한 계기였지만, 5·17 쿠데타 권력을 투표로 신임했다는 점에서 시민의식의 한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확인한 계기이기도 했다.
최근 JTBC 드라마 '설강화'가 6월항쟁의 배후에 남북 집권세력의 정치공작 음모를 깔고 운동권 남학생으로 '분장'한 간첩과 여대생의 로맨스를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대중문화 작품의 역사왜곡 논란이 처음도 아니지만, 그 논란이 외신에도 소개될 만큼 뜨거운 이슈로 부각한 데는 드라마의 문제적 상상력이 온전히 굳혀지지 않은, 그래서 아직 예민한 뭔가를 건드린 탓일 테다. 그게 민주화운동 자체인지, 그 운동의 적자임을 밑천 삼아온 정치세력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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