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유족 대상 현장조사 녹음파일 입수>
"작업자 말만 믿고 확인 없이 현장 재투입"
신속 탈출·구조 돕는 발광케이블 구비 안해
"산소통 소진 시점까지 교대 안 이뤄져" 지적도
유족들 "희생에서 배운 것들, 법적 반영을" 당부
①공사장 안전관리자가 아닌 인부의 말에 따라 대원들이 재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②비상시 동선을 추적할 수 있는 장비(라이트라인)가 지급되지 않았다.
③산소 잔량 등 교대를 위한 상황 점검이 이뤄지지 않았다.
6일 경기 평택시 냉동창고 신축 공사장 화재 현장에 투입됐다가 순직한 이형석(50) 소방경, 박수동(31) 소방장, 조우찬(25) 소방교의 유족들이 사고 이튿날 유족 상대로 진행된 현장조사에서 짚은 사고 원인이다. 언제든 치명적 위험이 뒤따를 수 있는 화재 현장 수색에 있어 확인되지 않은 말 한마디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구조였고(①), 소방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교한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았다(②, ③)는 점에서 인재(人災)에 가까운 참사라는 것이 유족들 입장이다.
특이사항 없었는데… 말 한마디에 재수색
9일 소방당국과 희생자 유족에 따르면 참사 다음 날인 7일 송탄소방서장을 포함한 소방 관계자들은 유족들이 참관한 가운데 화재 현장조사를 진행했다. 10일 경기남부경찰청, 경기도소방재난본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이 진행할 현장감식과는 별개다. 오전 10시 20분쯤부터 2시간 30분가량 진행된 이날 조사는 당국자들이 현장 곳곳을 안내하면서 사고 경위와 원인을 설명하고 유족들의 질문과 의견에 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날 한국일보는 조사 시작부터 종료까지 참가자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을 유족으로부터 입수했다. 녹음 내용 분석 결과 유족들은 소방당국을 상대로 사고 과정에서 드러난 현장 인력 운용상 미비점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녹음 속 소방당국 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을 포함한 구조팀은 6일 오전 8시 현장에 재투입되기 전까지 이미 세 차례 인명 수색을 마친 상황이었다. "5층에 3명이 남아 있다"는 공사장 인부의 증언 때문이었지만, 세 차례 수색은 모두 '특이사항 없음'으로 종결됐다. 공사장 안전관리자는 건물 안에 5명이 있었지만 모두 자력 대피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인부가 인상 착의를 구체적으로 묘사해 가며 고립된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하자, 구조팀은 혹시나 하는 의심으로 4차 수색에 돌입했다. 결국 수색 중인 오전 9시 12분 불이 다시 번졌고, 구조팀 5명 중 2명만 탈출에 성공했다. 인부의 주장과 달리 건물 내부에서 추가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조우찬 소방교 유족 이모씨는 현장에서 "(소방관에게) 안에 사람이 있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느냐"며 "작업자 말만 듣고 보낼 게 아니라 안전관리자가 파악한 인원과 비교해 책임 있게 지시해야 했다"고 성토했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이날 한국일보에 "공사 현장엔 비정규직, 일용직 등 안전관리자들이 모르는 작업자가 워낙 많아 추가 수색이 10번도 더 진행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씨는 "작업자의 말이 워낙 구체적이었던 탓에 소방 입장에선 추가 수색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며 "안전관리자에게 판단 책임을 부여해 관리자가 모든 인원의 대피를 확인했다면 소방은 수색을 중단할 수 있게끔 법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출로 확보 '라이트라인' 있었더라면
유족들은 현장 조사에서 4차 수색 당시 현장에 라이트라인이 구비돼 있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라이트라인은 소방대원이 미로처럼 복잡하거나 연기가 많이 나는 현장에 투입될 때 지급되는 발광 케이블로, 대원이 탈출로를 찾거나 대원수색팀(RIT)이 신속히 구조에 나서게끔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대원들이 갖고 들어가는 수관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지만, 유족들은 "수관은 (안에 들어간 대원이) 놓치면 끝이지만, 라이트라인은 자동으로 동선을 표시해주고 밖에서 그 선만 따라가면 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소방 관계자는 한국일보에 "현재 라이트라인 설치는 지침 정도로 모든 현장에 의무화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씨는 "(숨진) 3명이 발견된 곳에서 계단 출입구까지는 짧게는 1.5m밖에 되지 않았다. (세 명의) 시신을 빨리 찾는 문제를 떠나 정말 모두 살릴 수 있었다고 본다"며 "모든 화재 현장은 붕괴나 재발화의 위험이 있는 만큼 라이트라인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장조사에선 당시 구조대원들이 40분짜리 산소통 2개를 챙겨갔는데, 산소가 소진될 시점까지 대원 교대가 이뤄지지 않은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씨는 소방 관계자들에게 "오전 8시에 들어갔으니 (함께 투입된 팀원이 자력 대피한) 9시 10분쯤이면 산소가 모두 떨어지기 10분 전이었다"며 "(그 전에) 산소 교체는 했는지, 외부와의 무전 이력은 있었는지 확인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론 누가 들어가든 30분 단위로 상황을 점검하고 교대해주는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희생에서 배워달라" 문제 개선 요구
가족을 잃은 슬픔에도 현장 조사에 모인 유족들은 '구조적 문제 개선'을 거듭 당부했고, 관계자들은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한 유족은 "본질적 책임은 매뉴얼 법제화를 미룬 정치권에 있다"고도 지적했다. 동료를 잃은 대원들은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라며 유족을 위로했다.
이씨는 녹음 파일에서 "오늘 (현장에) 와보니 우찬이가 왜 그렇게 프라이드(자부심)를 가졌는지 알겠다. 나라면 못 들어갔을 텐데, 대원들이 존경스럽고 감사하다"며 "(세 사람의 희생으로) 배운 것들을 반드시 법적으로 반영해달라"고 호소했다. 유족에 따르면 소방당국은 라이트라인 및 산소통 교대 매뉴얼과 관련한 유족 요청을 검토해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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