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강진 병영면 전라병영성과 하멜 이야기
병역을 마친 사람들에게 군 복무지는 다시 거들떠보기 싫은 곳이다. 군대의 추억은 과장 섞인 무용담으로 소비될 뿐, 웬만해선 그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요새 군대 좋아졌다'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지금도 그렇지만, 강제 노역이나 다름없었던 옛날 군대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군사 기지를 지명으로 사용하는 곳이 있다. 전남 강진 병영면이다. 지역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병영성을 중심으로 골목골목 옛 이야기가 녹아 있다.
전라병영성에 왜 하멜 이야기만?
왜구의 잦은 침입, 이를 격퇴한 영웅 이순신의 활약 덕분에 조선 수군의 거점은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다. 경상좌수영과 우수영,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은 꽤 익숙하다. 반면 육군 사령부는 상대적으로 낯설다. 울산에 경상좌도병영성, 강진에 전라병영성이 남아 있는 정도다.
병영면으로 들어서면 우람한 성채가 우뚝 솟은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수인산 성자산 별락산 화방산 등 크고 작은 산에 둘러싸인 병영면은 분지 지형의 넓은 평야다. 전라병영성(이하 병영성)은 이러한 평지에 건설한 직사각형의 성이다.
태종 17년(1417)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해 고종 32년(1895)까지 조선 왕조 500년 가까이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1,060m, 높이는 3.5m에 이른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불타고 이어 갑오경장으로 폐영됐다. 객사와 문루가 즐비했고, 9개의 우물과 5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 성곽 안은 텅 비어 있다.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 일부만 남은 성곽을 기반으로 동서남북 4개 문루와 성벽만 복원했을 뿐이다.
뭔가 짜임새 있는 옛 병영의 모습을 기대했다면 허전할 수밖에 없다. 성터 한가운데의 거목을 비롯해 남문 누각의 소나무, 주변의 느티나무와 팽나무 몇 그루만이 고성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군사기지였으니 숱한 이야기가 전해올 법하지만 현장 안내문이나 소개 책자의 기술은 빈약하기만 하다. 임진왜란 직전인 1581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는 내용, 1599년 인근 장흥으로 병영을 일시 옮겼다가 5년 만에 복귀했다는 이야기 정도가 전부다.
이렇다 보니 500년 군사 도시에 네덜란드인 하멜 이야기만 넘쳐난다. 병영성 동문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풍차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기계가 아니라, 장식용 전망대다. 바로 옆의 하멜기념관은 현재 주변 조경 공사가 마무리에 있다.
병영성과 하멜이 무슨 관계일까? 효종 4년(1653), 동인도회사 선원이자 서기인 헨드릭 하멜이 탄 상선 스페르베르호는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제주 근해에서 폭풍으로 난파된다. 하멜은 살아남은 36명의 일행과 함께 조선에 14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고 귀국한 뒤 그 경험을 ‘하멜표류기’에 기술한다. 조선의 지리 풍속 정치 등을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한 책이다.
당시 ‘이방인을 외부에 보내지 않는다’는 조선 정부의 정책에 따라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 압송돼 감시를 받았고, 1656년 이곳 병영성으로 이송돼 7년간 억류 생활을 하게 된다. 머나먼 이국에서의 생활이 고되고 쓸쓸했을 테고,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했으니 조선에 대한 기억이 달갑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병영면의 하멜 이야기는 달콤한 호의로 포장돼 있다.
마을 중간에 ‘한골목 옛담장’이 있다. 돌과 흙으로 쌓은 토석담이 300m에 달하는 일직선 골목 양쪽을 장식하고 있다. 담장 위는 기와로 지붕을 처리했다. 토석담은 가지를 친 골목까지 이어져 마을 전체가 돌담집이다.
돌담 하부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상부는 작은 돌을 사용했다. 중단 위쪽의 작은 돌은 약 15도 정도 눕혀 한 줄을 촘촘하게 쌓고, 다음 층은 반대 방향으로 눕혀 빗살무늬 형식을 띠고 있다. 흔치 않은 독특한 방식이라 노동에 동원된 하멜 일행이 그들의 전통 방식으로 쌓은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안내문에도 ‘하멜식 담쌓기’라는 표현을 썼지만 공식 기록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마을 곳곳에 귀여운 외모의 하멜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압권은 하멜과 수인사 스님이 합장하며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다. 낯선 외모로 놀림받고 차별받는 속에서도 당시 수인사 스님들은 이들에게 먹을 거리를 나눠주며 친절을 베풀었다고 한다. 네덜란드 전통 춤을 추는 동상도 있다. 고된 노역과 오랜 타향살이의 설움을 고유의 춤과 노래로 달랬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공식 외교사절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억류된 이방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미화된 듯하다. 어쩐지 주인과 객이 뒤바뀌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속속들이 녹아 있는 생활의 지혜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면 하멜이 아니라 병영성의 오랜 역사와 주민들의 지혜가 녹아 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멜과 스님 동상이 세워진 하천은 ‘적벽청류’라 불린다. 자연스럽게 파인 암반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다. 규모에 비해 과장된 명칭이지만 마을을 아끼는 주민들의 멋스러움이 배어 있다.
성동리 은행나무는 병영면의 자부심이다. 키 32m, 가슴높이의 둘레 7.2m, 수령 약 800년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을 중앙에 뿌리내리고 있다. 사람은 나무를 돌보고 나무는 사람을 보살핀다. 주민들은 마을의 수호신과 다름없는 이 나무에 매년 음력 2월 15일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고 있다.
병영천변의 삼인리 비자나무도 마찬가지다. 이 나무가 500년 가까이 벌채를 피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전라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할 때 주변의 쓸 만한 나무는 모조리 베었으나, 당시 이 나무는 작고 휘어서 목재로 부적당했다. 못생긴 나무가 마을을 지킨 셈이다. 비자나무 열매는 당시 유일한 구충제였기 때문에 특별히 보호받았다고도 한다. 역시 매년 음력 1월 15일이면 주민들이 나무 주위를 돌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
병영성 서문에서 가까운 하고저수지에는 병영의 관문이었던 홍교(虹橋)가 남아 있다.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 다리다. 일명 배진강다리라고도 하는데, 장방형 화강석 74개를 26열로 정교하게 쌓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위를 다졌다. 아치 중앙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가 돌출돼 있어 이채롭다. 이 다리는 노비와 양반집 딸 사이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징표로도 해석된다. 둘이 낳은 아들이 높은 벼슬을 받고 돌아오자 양한조라는 사람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고저수지 주변은 아담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호수를 가로질러 덱을 설치해 놓았고, 요즘은 꺾여진 연대가 수면에 데칼코마니 작품처럼 장식돼 있다.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억새와 갈대가 하늘거린다.
하고저수지를 비롯해 인근 중고·요동·돌야 저수지는 병영천과 함께 ‘강진 연방죽 수로농업시스템’을 형성해 지난해 국제배수위원회(ICID)에서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1417년 병영성 건설과 함께 갖춰진 것으로, 간척지를 제외하면 전남에서 두 번째로 넓은 한들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됐다.
농경지 곳곳에 만든 연못은 이모작을 가능하게 했고, 병영천에 설치된 보는 마을에 생활용수를 공급하게 했다. 1차로 가정집에서 사용한 물은 농업용수로 재사용되고, 다시 병영성 해자로 유입되는 구조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생태농업의 지혜가 녹아 있는 시스템이다.
병영성에서 약 3㎞ 떨어진 ‘와보랑께박물관’은 소박하지만 흥미진진한 볼거리로 가득하다. 석유 곤로와 등잔, 다기와 제기, 벌통을 덮는 멍덕과 노끈 등 3,000여 점의 생활용품을 빼곡하게 진열하고 있다. 모두 김성우 관장이 오랜 시간 모으거나 기증받은 물건들이다.
그중에서도 그가 직접 그린 사투리 그림이 흥미롭다.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 숨어 있는 ‘염빙하네’, 그림으로 구현된 ‘아따거시기’ ‘해보랑께’ ‘우짜까잉’ ‘냅두랑께’, 자신의 군번과 ‘실천’이 녹아 있는 군인 자화상,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아무것도 아닌디’ 추상화까지 생활 사투리가 작품 속에 재미있게 녹아 있다. ‘달지(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쇼이’ 등 안내문까지 정겨운 사투리다.
30여 년 전 당시 잊히는 사투리를 잘 쓰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적기 시작했고, 하얀 종이에 긁적거리다 보니 그림이 되었고, 박물관을 열었다. 박물관 이름을 뭐라고 할까 고민하는데, 부인이 '그냥 와서 보라고 하지 뭘’이라고 했다. 와보랑께박물관이 탄생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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