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네가 그 유명한 X세대라며? 나는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이런 질문을 던진 이는 처음 만난 2학년 선배였다.(그럼 너는?) 네, 제가 바로 그 X세대입니다라고 시원하게 대답하면 좋았겠지만 나는 풍문으로만 듣던 X세대가 뭔지 잘 몰랐다. 내가 압구정이니 오렌지니 개성이니 뭐니 하는 걔네라고? X세대. 90년대에 20대였던 1970년대생. 한 광고 기획사는 이렇게 정의한다.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파였으며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했던 세대로 경제적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던 세대.
내가 X세대였을까?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하고, 어쩌다 구해도 이상한 곳에 끌려가 착취를 당했지만 시간당 천몇백 원이라는 돈 때문에 눈치를 보며 끝내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못한 내가? '사장님, 주차장 알바를 왜 공사판에 끌고 가나요?' 임금 체불에 결국 돈을 떼이던 내가? (사장님 제 180만 원은요?) 내가 X세대였을까? 깜빡하고 부모님께 차비를 부탁하지 않으면 가구 밑을 긁어서 나온 동전을 모아 학교에 가던 내가? 내가 X세대였을까? 어쩌다 생긴 소개팅 비슷한 자리에 나가려다 지갑에 2,500원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깔끔하게 집에 있기로 결심했던 내가?(이건 정말이지 지금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X세대를 다룬 90년대의 신문기사들을 검색해 보았다. 그 기사들과 이미지들 속에서 나의 20대는 없었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며 마음껏 소비하는 세대가 되라는 자본주의의 호명에 기꺼이 응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런 부름에 응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기사 속 X세대의 삶의 양식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질문은 계속된다. 서울의 대학가 거리를 걷는 남녀의 이미지로 가득한 그 기사 속에서 지방의 청년들은 X세대였을까? X세대에 대한 그 많은 담론 속에서 대학을 가지 않은 청년들은 X세대였을까?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감각적인 소비자. X세대라는 이름은 그런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한 동시대의 수많은 청년들의 다종다양한 삶과 서사를 소거해버렸다. 이제야 깨닫는다. X세대. 그게 나를 부르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는 X세대의 일원이 아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거의 음모인데.
움베르토 에코는 명명을 모든 상이한 개체들을 상이한 시점에서 동일한 유형의 사례로 확신시키는 사회적 행위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거창한 게 아니라 우리가 들판에서 볼 수 있는 날짐승들을 '새'라고 부르는 원리를 풀어 말한 것이다. 그런데 X세대라는 명명에 개입된 사회적 행위에는 좀 더 복잡한 역학관계가 개입한다. 이 명명에는 자본주의라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이때 명명은 환상을 손쉽게 실재로 바꾸고, 그 실재를 다시 환상으로 순환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렇게 자본은 20대의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 동년배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양식과 가져야 하는 취향과 갈망해야 하는 욕망을 X세대라는 명명을 통해 정해주었다. 너희는 이제 능동적인 소비자가 되어라. 내 동년배들은 자본이 미리 만들어 놓은 기표 안에, 우리의 실재를 끼워 맞추도록 강요받은 셈이다. 더 무서운 것은 산을 산이라고 부르고, 강을 강이라고 부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느끼는 것처럼, X세대라는 명명도 자연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X세대라는 명명이 실재와는 다른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실재가 다른 존재가 되도록 강제하는 전략이었다면, 반대로 그 이름 속에 들어 있는 의미들을 삭제함으로써 실재를 부정하는 전략도 있다. 요즘 대선 정국에서 호출되고 있는 '청년'이라는 말의 용법이 그렇다. 얼마 전 한 대선 후보는 영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 여성 정치인을 내치면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2030'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고, '기성세대'에 치우친 판단으로 '청년세대'에 큰 실망을 줬다고 사과했다.
여기서 청년은 누구를 호명하는 것일까? 청년이라는 어휘의 의미는 여러 개의 성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범박하게 그 의미 성분들을 떠올려 보자. '인간' '여성' '남성' '젊음' 등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 속, '청년'이라는 말의 의미 성분표에는 '여성'은 추방되어 있다. 혹시 그런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불러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정작 그 이름을 부른 이가 당신을 모른 척하는 경우. 그건 내 이름인데요. 아니, 그건 너의 이름이 아니야. 너는 이름이 없어야 해. 그렇게 해서 당신의 존재를 지우는 방식.
이 뺄셈의 명명법에서 추방된 것이 여성이라는 속성뿐일까? 이 배제의 언어 게임은 청년이라는 이름에서 여성 혐오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도 빼고, 장애 청년도 빼고, 성소수자도 빼고,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젊은이들도 빼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도 빼고, 이주민 청년도 빼고, 목소리를 얻지 못하는 청년들이 처한 수많은 삶을 그저 빼고 계속 빼서, 청년이라는 기표에 자신들이 겪는 고통 중 상당 부분은 여자들과 여성가족부 때문이라고 믿는 남자라는 앙상한 기의만 남겨 놓는다.
의미론이라는 언어학 분과에서 다루는 '원형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원형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고정된 의미 성분을 하나하나 분석한 후(+날개, +깃털, +비행 가능) 하늘을 나는 동물들을 '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참새와 같은 가장 전형적인 사례, 즉 원형을 중심으로 '새'의 범주를 구성하고 인지한다.
뺄셈의 명명법은 소위 '이대남'을 청년의 '원형'이라고 정해놓고 그 주위를 철조망으로 둘러친 후 그 나머지는 청년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원형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범주가 분명한 경계선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연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알려준다. 참새 같은 가장 새다운 새도 새이지만 타조나 펭귄처럼 가장 새답지 못한 새도 새라고 인식하는 이유다.
높이가 낮고 폭이 넓은 그릇을 우리는 사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회언어학자 라보브의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 그릇에 음식이 들어 있으면 사발이라고, 꽃이 들어 있으면 꽃병이라고, 커피가 들어 있으면 컵이라고 부른다. 이십 대의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대남'이라는 빈한한 기호로 고정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수많은 정체성들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세상을 구분하고 범주화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범주를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그리고 어떤 범주는 우리를 살게 하지만, 또 다른 범주는 우리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이대남이라는 범주는 후자다.
이대남. [반페미니즘]이라는 하나의 의미 성분만 가진 텅 빈 풍선 인형 같은 기호. 그러나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펌프질에 점점 거대해져서 모든 세대에게 '너희는 이제 포위되었다'라고 외치는 이름. 글쎄다. 이십 대 남성들의 삶과 서사가 이러한 이름으로 대표되는 게 정말 맞는 것일까?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젠더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세대끼리 서로 확성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게 만드는 이 빈곤한 상상력의 정치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나는 X세대가 아니었다. 지금에야 깨닫는다. 사회가 나를 그렇게 호명했지만 그건 나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찬가지다.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일단 의심하시라.
그게 진짜 당신의 이름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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