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슨 총리 위기 구하기 위한 보수 결집용 카드
역효과 불렀지만...영국 내 '수신료 논란' 재점화
"연 26만원, 세금과 같아...빈자·고령층 지원 필요"
유서 깊은 영국 공영방송 BBC가 최근 '수신료 폐지' 논란에 휩싸였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가 수신료를 2년 동안 동결하면서 최종적으로는 폐지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지지하는 쪽에서는 '수신료' 개념은 낡은 개념이고, 미디어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공영방송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주장한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공공성'의 개념에 불만이 많은 이들과 정부의 입맛에 맞게 언론을 길들이기 위한 변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0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BBC는 2028년에 새로운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전히 "모든 나라가 질투하고 선망하는(영국 배우 휴 그랜트)" 공영방송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보수당 숙원이지만...'존슨 총리 구하기' 설익은 카드
16일 데일리메일의 일요일판 '메일 온 선데이'를 통해 나딘 도리스 영국 문화부 장관은 공영방송 BBC의 수신료를 2년 동결한 후 4년 동안 물가상승률에 준해 올린다는 계획을 밝혔다. 동시에 2028년부터 수신료 자체를 아예 폐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다. 도리스 장관이 2028년을 수신료 폐지 시점으로 밝힌 이유는 10년 단위로 갱신되는 왕실 칙허장에 따라 BBC에 수신료 교부권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메일 온 선데이'에 인용된 '도리스 장관의 측근'의 발언은 더 도발적이다. "우리가 알던 BBC는 끝났다. 공영방송의 시대는 끝났다." 이 매체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새로운 민간 미디어 기업의 성장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했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번 행보가 2020년 파티에 참석해 방역 수칙을 위반한 것이 드러나 위기에 몰린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정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보수 진영 결집 수단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BBC의 수신료 폐지는 긴축과 민영화를 선호하는 보수당의 숙원 중 하나이고, 수신료라는 수입원을 잃은 BBC는 결국 부분 민영화 등의 경로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책 발언이 별다른 대책 없이 나온 것이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도리스 장관은 17일 하원에서 쏟아지는 질문으로 궁지에 몰리자 "(BBC 수신료 폐지는) 앞으로 논의할 수 있는 일"이라고 회피해 버렸다. 그는 BBC가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재원 조달 방식도 검토하지 않았다고 실토했고, "다른 모든 것들은 물가에 따라 비용이 오르는데 유독 BBC 수신료만 동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보수당 원로 피터 보톰리 하원의원의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다.
국제적 위상 높지만 국내선 의견 엇갈려
BBC는 2017년부터 'BBC 코리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한국 네티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단순히 BBC 영어 기사를 번역해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한국에서 취재한 내용을 다루는 영상도 공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수신료의 가치는 KBS가 아닌 BBC가 구현하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BBC는 KBS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관영언론이 질시할 만한 국제적 영향력을 자랑한다.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은 "BBC에 비견되는 국제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국제보도채널 '프랑스24'를 만드는 데 상당한 비용을 쏟았다. 영국의 유명 배우로 현재는 미디어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는 휴 그랜트는 트위터에 "국제적인 선망의 대상인 BBC를 이 불안정하고 화가 잔뜩 난 미치광이 정부가 무너뜨리려는 모습은 참 적절하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과 달리 영국 내에서는 BBC에 대한 여론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BBC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때 잔류파와 탈퇴파 양측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잔류파는 탈퇴파의 거짓을 그대로 늘어놓는다는 이유로, 탈퇴파는 사실상 잔류파 측의 논조에 기울어 있었다는 이유로 BBC를 공격했다.
BBC에 대한 보수 진영의 고정 비판 중 하나는 "영국 국민의 돈을 받으면서 외부 입장에 치우쳐 정작 영국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존슨 총리를 지지하는 브렉시트 진영의 '국제주의 비판'과도 연결된다. 도리스 장관도 "BBC의 집단사고"를 문제 삼으며 은근히 이런 여론을 부추겼다.
BBC 가치 지지자도 "수신료는 낡은 개념"
근본적으로 BBC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제도적 틀이 '수신료'라는 낡은 개념인 것도 문제다. 기본적으로 '수신료'는 TV를 시청하는 사람에게 징수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BBC의 TV 시청층은 점차 고령화하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PC나 스마트폰, 태블릿으로 영상을 소비한다. 심지어 수신료를 내지 않아도 인터넷 플랫폼에서 BBC의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현재 형태의 TV 수신료가 사라질 경우 그 비용을 다시 채우는 방안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미디어 시장조사기업 앰피어는 광대역 인터넷망에 소비자 인당 연 138파운드를 물어 수신료를 대체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인터넷망이 필수인 현 시점에 가난한 가정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운영 비용에서 정부 보조금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도 있지만 이 경우 방송이 정부 입김에 휘둘리기 쉬울 수 있다. 애초에 BBC 구독료를 받자는 방안도 나오지만, 라디오나 지상파의 송출 방식을 고려하면 이 역시 비현실적이다. 인터넷이 아무리 대중적이라도 라디오나 TV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순 없다.
현재 영국의 BBC 수신료는 연 159파운드(약 26만 원)로 월 2만1,600원꼴이다. 한국의 KBS와 EBS에 돌아가는 수신료(월 2,500원)의 8배가 넘는다. 만만찮은 비용이지만, BBC의 높은 위상과 폭넓은 서비스 규모를 고려하면 "1일 43펜스(0.43파운드)로 이 서비스가 나온다"는 옹호론도 없지 않다. 영국 내에서는 모든 BBC 방송에 광고가 없고, 24시간 채널 3개를 비롯해 각 지역별로 수십여 개 채널과 온라인 서비스가 모두 무료로 제공된다. 단 해외 채널이나 해외 접속 온라인 서비스에는 광고가 도입돼 있다.
BBC 스포츠에 출연 중인 축구선수 출신 전설적 해설자 게리 리네커는 2020년 초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TV를 원하면 강제 징수되기 때문에 사실상 세금이나 마찬가지다"라면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과 고령자들을 제외하고 징수하는 '자발적 징수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공공 서비스로서 BBC의 가치를 인정하되, 이를 여력 있는 사람이 분담하는 것으로 수신료의 개념을 바꾸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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