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여러분의 일상다반사를 들려주세요. MBTI상 확신의 논리형(T)인 8년 차 기자와 뼛속까지 공감형(F)인 4년 차 기자가 하나의 고민에 서로 다른 콘텐츠를 추천하는 큐레이션입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비범한 고민에 특유의 단짠 제안을 해드립니다.
"20대 전업주부로 사는 제 삶에 확신이 없어요."
29세 전업주부입니다. 전 어렸을 때부터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게 가장 큰 목표였어요. 특목고를 다니면서 과도한 경쟁에 시달렸고, 20대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외로움을 크게 겪었어요.
엄마는 '치맛바람'이 강했어요.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 입시,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 입시 때문에 저와 자주 다퉜어요. 대학 졸업 후 귀국하자 제게 "빨리 결혼을 하라"는 압박을 주기도 했어요. 참고로 부모님은 결혼 직전까지 제게 통금시간을 밤 10시로 정해 외출 때마다 확인 전화를 하곤 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토록 원하던 결혼을 했고 보수적인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습니다. 결혼 직후에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던 회사를 그만뒀어요. 후회는 한 번도 안 했어요. 원래 직업적 성취에 대한 기대가 큰 편이 아니었거든요.
지금은 나름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아 부동산 재테크도 하고 있어요. 이미 서울에 자가도 두 채 마련했어요. 친구들과도 가끔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수다 떨기도 하고요. 남편도 시부모님도 정말 제게 잘해줍니다. 괜히 속 끓이는 일 없이요.
그래서 전업주부만 되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제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평일 오전 한적한 백화점에서 마음껏 비싼 명품을 사보기도 하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셔보기도 하는데 공허함이 가시질 않아요.
전문 직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를 보면 '내 삶이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요. 요새 등산이 대세라는 얘기를 들으면 '나도 등산을 시작해야 하나' 싶어요. 물론 친구들은 '네가 가는 길 자체가 옳은 것이다'라고 해주고, 저도 그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신이 없어요.
저 잘 살고 있는 거 맞을까요. 여기서 뭘 더 해야 할까요.
황민주(가명·29·주부)
◇ F형 기자의 추천 콘텐츠
잘 사는 건 뭘까요. 너무나 어려운 질문입니다. 잘 사는 것의 기준은 또 뭘까요.
우리 모두에겐 예외 없이 24시간이 주어집니다. 그 안에서 겪는 개개인의 삶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순간순간이 우리들 삶을 촘촘히 채웁니다.
민주씨는 충분히 잘 사는 것으로 보여요. 인간관계, 취미활동, 가정, 의식주 등 삶에 필요한 요소들이 잘 버무려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불안하고 확신이 안 서는 걸까요.
저는 이런 민주씨에게 양다솔 작가의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추천해요. 코로나19의 한복판에서 직장을 그만둔 양 작가는 백수 생활이 길어지는 상황에서도 매일을 알뜰하게 꾸려 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주전자에 물을 올려 보이차를 끓인 후 호로록 마십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영화를 보고, 한강을 달리고, 뜨개질을 합니다. 그러다 배고프면 맛있는 걸 해 먹습니다.
여름이 되면 냉장고에 시원한 수박을 넣고 봉숭아 꽃잎으로 손톱에 물을 들입니다. 팥빙수를 만들어 먹기 위해 업소용 팥 통조림을 사서 먹을 만큼만 남긴 후 나머지는 이웃들과 나누기도 합니다.
이런 삶에 대해 양 작가는 "절벽 앞에 텐트를 친 듯한 기분이 든다"면서도 "절벽에서 보이는 풍경은 오늘도 아름답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정말 이상하게도, 전혀 가난해지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매일 앞이 보이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갖는 삶의 원천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작가는 "하루를 하나의 삶처럼 산다"고 말합니다.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잘 살아낼지 고민하면서 능동적으로 사는 거죠. 그렇게 살 때 민주씨도 민주씨의 삶을 긍정하고 확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겁니다.
◇ T형 기자의 추천 콘텐츠
'논리추구형'은 대체로 어떤 행동의 이유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내면의 어떤 점에 고민의 근원을 두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어떤 행동의 뿌리나 결핍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서부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가끔 공허함을 느낄 때 주변의 많은 이들이 다양한 해법을 내놓죠. "등산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전문직 친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지만 어쩐지 부족한 것 같은 이유는 이들 해법이 아마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어서일 겁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민주씨만의 '기준'을 찾는 일입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기준을 만족하는 삶을 누리고 있는데도 어쩐지 공허한 마음이 든다면 필경 충족되지 않는 자신의 기준이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런 당신을 위해 저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상설 전시 '사유의 방'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 전시관에는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요. 뛰어난 주조기술로 머리에 쓴 관의 화려한 문양과 옷자락의 흐름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깊은 고뇌에 빠진 듯한 절제되고 근엄한 태도를 품은 반가사유상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인생을 겸허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미술 애호가인 방탄소년단의 리더 RM도 최근 이곳을 찾았다고 하네요.
나란히 앉은 반가사유상 앞에 서서 잠깐 동안만이라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요.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했을 때 가장 행복했는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되물으며 말이죠. '사유의 방' 안에서만큼은 어린 시절 시달렸던 타인과의 경쟁도, 민주씨를 억압했던 부모님의 통제도 없을 테니까요. 운이 좋다면, 거듭된 사유의 끝에서 명료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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