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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말레비치만 있나...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 즐기는 다섯 가지 방법

입력
2022.01.28 13: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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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한 관람객이 나데즈다 우달초바의 '부엌'을 감상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한 관람객이 나데즈다 우달초바의 '부엌'을 감상하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설 연휴에는 미술관 나들이가 제격이다.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 한창이다. 현대 추상 미술의 거장 바실리 칸딘스키와 카지미르 말레비치를 위시한 1910, 1920년대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현대까지 흐르고 있는지 가닥을 잡을 수 있는 전시다. 낯선 100년 전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이미 우리 곁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으로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역 49명의 작품 75점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이훈석·황규진 큐레이터의 도움말로 관전 포인트를 짚어봤다. 전시는 연휴 내내 이어진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7시 30분(입장 마감 오후 7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유대인 비너스'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작을 알린다.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유대인 비너스'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작을 알린다.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


서구 모더니즘에 러시아 전통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작

한 여인의 나신이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솥뚜껑처럼 크고 두꺼운 손과 발, 풍만한 육체, 무릎 아래 남은 양말 자국까지. 일말의 부끄러운 기색 없이 여유로운 표정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도 한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당당하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비너스 연작 중 하나인 '유대인 비너스'다. 미의 여신 비너스를 너무나 태연하게 제목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기존 서구 중심 미술계가 지닌 여성의 몸과 미에 대한 관념을 비틀어 뒤집고 조롱한다. 여기에 러시아적 역동성이 더해진다. 왜곡된 형태와 대담한 색채는 러시아 전통의 이콘화(성상화)와 루복(민속 판화)의 흔적이다. 그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추수꾼들' 역시 대표적이다. 이른바 신원시주의를 표방한 이 부부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작을 알린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No.217. 회색타원'. 칸딘스키 추상 실험의 절정을 보여준다. 예카테린부르크미술관 제공

바실리 칸딘스키의 '즉흥 No.217. 회색타원'. 칸딘스키 추상 실험의 절정을 보여준다. 예카테린부르크미술관 제공


현대 추상 개척한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유럽 모더니즘을 자기화하면서 러시아만의 새로운 미술의 탄생을 알린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추상으로 나아가며 꽃을 피운다. 잘 알려져 있듯 칸딘스키는 이른바 뜨거운 추상(비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다. 차가운 추상(기하학적 추상)은 으레 몬드리안으로 대표되지만 그보다 앞서 하얀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을 그려 가장 극단의 추상으로 밀고 나아간 말레비치가 있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유파를 이끌며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서구 중심 예술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됐다. 따지고 보면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러시아의 두 예술가가 현대 추상회화를 개척한 셈이다.

이번 전시의 칸딘스키 작품은 수가 많지는 않지만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의 '즉흥' 연작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즉흥 No.4(1909년 작)'는 어느 정도 단순화된 형태를 보이지만 나무와 숲, 석양이 드리운 하늘과 구름 등의 묘사에서 여전히 표현주의 경향이 확인된다. 구상과 추상의 중간 단계에서 칸딘스키는 '즉흥(1913년 작)'으로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유려한 선의 배치를 선보인다. 그의 관심이 색채에서 선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즉흥 No. 217 회색타원(1917년 작)'은 칸딘스키 추상의 극치다.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유파를 이끈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유파를 이끈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

"더 이상 회화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데 머물러선 안 된다"고 했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1915년 작)'를 통해선 추상 실험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 같은 해 발표한 그의 대표작 '검은 사각형'과 같은 크기의 이 작품은 검은 사각형과 붉은 사각형, 검은 원, 십자 형태가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제목과는 달리 피아노와 여인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말레비치의 초기작 '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을 통해선 절대주의 탄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비구상적 구성'을 보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비구상적 구성'을 보고 있다. 한지은 인턴기자


낯설지만 이미 우리 곁에... 오늘날 건축·디자인에 큰 영향

절대주의로 대변되는 순수 추상회화가 힘을 얻던 시기, 전쟁과 혁명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준다. 순수미술을 지향한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에 반기를 든 이들은 예술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무게추는 흔히 구성주의로 불리는 구축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기울게 된다. 오늘날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생산적 미술로, 20세기 현대미술은 물론 건축, 사진, 디자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번 전시에선 구축주의를 대표하는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와 엘 리시츠키를 만날 수 있다. 구축주의의 선구자인 블라디미르 타틀린을 작품이 아닌 전시장 내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영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로드첸코와 엘 리시츠키의 작품만으로도 충분하다. 로드첸코의 초기작 '비구상적 구성(1919년 작)'은 작은 도형들의 곡선과 명암을 통한 양감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는 회화에 물질성을 부여해 실용적 예술을 추구하던 구축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줬다. 그는 소련 시절 광고, 디자인, 사진예술의 아버지로 불렸다.


한 관람객이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 1A'를 휴대폰에 담고 있다. 홍인기 기자

한 관람객이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 1A'를 휴대폰에 담고 있다. 홍인기 기자

리시츠키는 현대 타이포그래피와 일러스트레이션, 전시 디자인,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건축과 인테리어에 활용하려던 그의 시도는 '프로운 1A'에 담겼다. "이 작품은 회화에서 건축으로 건너가는 환승역"이라는 게 리시츠키의 설명. 이번 전시에 걸린 '프로운 1A'는 1919년 처음 제작한 작품을 판화로 다시 찍은 것으로, '다리'라는 부제목이 붙어 있다.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추수꾼들'. 예카테린부르크미술관 제공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추수꾼들'. 예카테린부르크미술관 제공


뮤즈 아닌 예술가로 이름 남긴 여성들

앞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작을 알린 예술가로 소개된 곤차로바는 다수의 러시아 여성 작가들의 롤모델이다. 32세 때 여성 최초이자 아방가르드 예술가 중 처음으로 모스크바에서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곤차로바를 비롯해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 '미술 혁명'을 이끈 6명의 여성 예술가를, 여전사들로만 이뤄진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전설적인 부족의 이름을 따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마조네스'라고 부른다. 이 중 곤차로바와 올가 로자노바, 나데즈다 우달초바, 류보프 포포바를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남성 미술가의 뮤즈로만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친 이들이다. 경제·사회적 평등을 지향했던 당시 혁명의 영향이다. 곤차로바의 '추수꾼들', 로자노바의 '비구상적 구성', 우달초바의 '부엌', 포포바의 '회화적 아키텍토닉스'를 주목해보자.


같이 보면 좋은 전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 전시를 함께 보길 추천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뿌리에 있는 게 바로 러시아 전통의 성상화인 이콘이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작품 '검정 사각형'을 두고 "이콘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했다. 이 전시는 러시아 이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5~19세기 동방정교회 이콘 유물 80여 점을 국내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과 함께 이 전시를 총괄한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 한 쌍의 기획전으로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는 러시아 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다"며 "이콘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 예술 세계를 일궈낸 러시아 아방가르드까지 올 겨울은 러시아 미술에 흠뻑 젖어보길 권한다"고 했다. 2월 27일까지.

아울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에서는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오마주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댄 플래빈이 형광등을 재료로 만든 'V. 타틀린을 위한 기념비'다. 5월 8일까지.


다비드 시테렌베르크의 ‘푸른 화병이 있는 정물'.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

다비드 시테렌베르크의 ‘푸른 화병이 있는 정물'.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소장


큐레이터's PICK

이훈석 큐레이터가 전시작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다비드 시테렌베르크의 '푸른 화병이 있는 정물'이다. 하얀 식탁보는 실 한 올 한 올을 확인할 수 있게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진 반면 그 위에 놓인 배와 사과, 푸른 화병은 평면적으로 매우 단순화돼 있다. 이 큐레이터는 "형태상으로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동시에 사실성을 잃지 않는 작품 구성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며 "당시 주류 흐름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을 견지해 나간 점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황규진 큐레이터는 곤차로바의 '추수꾼들'을 꼽았다. 윤곽선이 강조되고 평면성이 부각되는 투박하면서도 정감 있는 표현이 특징인 이 작품은 루복의 양식을 빌렸다. 그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여성 작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며 "추수꾼의 모습 자체에서 직관적으로 사회적 변혁을 열망하는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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