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15> 전남 완도~장도 청해진 유적
역사적 상상력이 뭉개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곳이 전남 완도 바다다. 그리고 그 섬의 동쪽에 보이는 작은 섬이 바로 청해진(淸海鎭) 유적이 남아 있는 장도(將島)다. ‘청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동아시아 바다의 해양경찰대이자 현대적 의미의 종합상사가 시작된 곳이다.
실존 인물이지만 전설 같은 삶을 살다간 해상왕 장보고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꿈의 세상을 말할 때 '블루 오션(Blue Ocean)'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아마도 장보고라는 이름에서 그 뜻의 근원이 있을 것이라는 농담도 통할 만하다. 왜냐하면 ‘보고’라는 이름을 일본에서는 寶高, 즉 보물과 지위의 높음이라고 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인물 중에서 왕들을 제외하고 한중일 삼국에서 공히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시대의 영웅으로서 국경을 뛰어넘는 중국에서 출세, 말 그대로 해상왕으로서 누렸던 부와 영화, 그리고 신라왕이 보낸 자객에 의한 비운의 죽음이 장보고의 인생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완도, 풍요의 섬
삼국사기에 ‘조음도(助音島)에 청해진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완도의 옛 이름은 조음도였다. 반짝거리는 짙은 파란 잎사귀의 나무들인 상록난대활엽수림이 섬을 덮고 있다. 남해안 지역에서 흔히 이른 봄 정열적 분위기를 만드는 동백꽃도 바로 그런 종류다. 지난 만 년의 세월 동안 바다가 상승하면서 섬의 해변을 깎아 오늘날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벽을 만들었고, 씻겨나간 돌과 흙들은 명사십리와 같은 해변이나 작은 강 어구에 갯벌과 낮은 바다를 만들었다.
완도를 포함하는 서남해안의 큰 섬들은 계절풍과 해류가 중국 남부 그리고 일본 열도를 연결해주니 문화 역시 풍성한 곳이다. 고대로부터 해로의 요충이어서 왜구들이 자주 출몰했던 지역이지만, 다양한 동아시아 문화의 흐름이 유입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깨어 있기도 하고, 또한 저항의식이 있던 곳이다. 진도의 삼별초 항쟁이나 소안도의 독립운동 등이 이 지역의 문화의식을 대변한다.
한편으로는 중국 월주요(越州窯)의 영향으로 이곳에서 9세기 전반경에 '해무리 굽의 청자'가 시작된 것 역시 그러한 문화적 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좋은 생태환경과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큰 섬임에도 불구하고, 청해진이나 군진의 설치 이외에 역사상으로 19세기 이전에 군현이 설치된 적이 없다는 점은 하나의 수수께끼다.
장도의 성터 유적
코로나로 인해 관광객이 뜸해진 탓인지 청해진 장보고기념관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섬으로 둘러싸인 잔잔한 바다가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한다. 바로 그 앞 작은 섬이 사적 308호 장도 청해진 유적이다. 오래전, 이곳저곳을 파서 허연 속살이 보이던 발굴 현장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기와 성문이나 루대 건물과 파란 잔디가 잘 정돈된 풍경이다.
원래 썰물 때 드러난 바닥으로 건넜지만, 이제는 나무 다리 위에서 복원된 문과 누대를 감상할 수 있다. 발굴 때 바다에 삐죽이 내밀고 있었던 통나무들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기억에, 다시 확인하려고 자잘한 자갈해변으로 내려갔다. 노란 깃발이 그 통나무열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장도 유적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1959년 '사라'호 태풍 때다. 태풍 때문에 바다 속에 통나무열이 처음 발견됐다. 탄소동위원소연대가 8~10세기 범위이니, 바로 장보고가 활약한 시기이다. 이 통나무열은 방어용 목책으로 보기도 하지만, 큰 집의 기둥을 세울 때 만드는 적심(積心)들이 섬에 가까운 지점들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 구조가 단순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성의 사면 아래 돌에 남아 있는 불자국과 목탄들은 큰 화재를 암시하고 있다. 부두처럼 목구조물이 있었고 배가 정박해 짐을 내리는 부두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도는 큰 섬이 아니다. 야구장 하나 크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동쪽과 남쪽으로 지대가 높고, 바다 쪽으로 경사가 급하다. 서쪽으로 내부가 낮아서 빗물들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있다. 동쪽 언덕에 숲으로 둘러싸인 장보고 사당이 있는 터가 꽤 넓은데 주변에 건물들이 몇 채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사당 옆에는 여러 군데에서 모아온 건물의 주초석들이 성내에 건물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주 특이하게도 ㄷ자 모양 판축으로 뚝을 만들었는데 그 속에 우물이 있다. 섬이 고립되면 반드시 물이 필요한데 아마도 수맥이 그 지점을 지나게 되어 성의 입구에 만든 것이리라. 아주 잘 만들어진 깊은 이 우물을 바닷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주변에 작은 토성을 쌓았다. 그만큼 이 우물이 장도의 생존에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섬에 아주 가까운 섬이지만 먹을 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장도에 주둔한 사람들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도를 청해진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장보고 그리고 청해진
청해진은 장보고가 중국에서 돌아와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에게 신라인들이 중국에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서남해안 왜구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828년에 설치한 해군본부였다. 장보고는 공식적으로 대사(大使)라는 특별한 관직을 받았는데, 분명 준독립적 위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 화남과 흑산도, 신안 등을 연결하는 대중 해상교통로를 고려한다면 진도나 신안의 다른 섬들이 접근성 면에선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완도에 진을 설치한 건 섬이 크고 교통요지란 이유도 있겠지만, 나중에 장보고가 신무왕에게 딸을 왕비로 보내려다 해도인(海島人)이라고 반대하는 신하들 때문에 거절당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완도가 그의 고향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장보고는 당나라 부대 중 하나인 무령군의 소장으로 산동반도를 통치하며, 고구려 유민이자 반당나라 세력이었던 이정기 일가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당의 동해안 지역에서 이씨 세력의 관할이었던 신라인들의 힘을 유지하고 활용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며 귀국했을 것이다. 841년 염장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그는 당시 신라의 다른 호족들처럼 반독립적 위치에서 황해나 동중국해의 교역중심지 역할을 했고, 때마침 사무역이 성행하던 시기라 삼각교역을 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중국 산동과 명주뿐 아니라 훨씬 남쪽에 있는 천주, 일본의 규슈의 다자이후를 연결하는 중심 거점으로서 동아시아 해상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기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장보고가 세운 산동 적산포의 법화원에 기거를 하고 다시 신라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완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히 황해는 ‘신라의 바다’였던 것이다. 신라 왕족으로 나중에 신무왕이 된 김우징도 왕권 다툼 끝에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장보고의 힘으로 왕이 됐다. 청해진의 20여 년 짧은 운명이 아쉽기만 하다.
장도의 고대에 오르니
'고대(高臺)'라 불리는 장도의 높은 곳에 오르면 진도나 해남 쪽에서 들어오는 바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고흥으로 빠지는 신지도와 고금도 사이 바닷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누가 봐도 해군 사령부로서 최적지다.
그렇지만 단지 장도의 유적이 청해진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무역선이 도착하면 이곳엔 파시(波市: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처럼 일시적으로 수입된 물건을 경주나 다른 지역으로 가져갈 사람들로 크게 북적였을 것이다. 해적과 맞설 병졸들이 주둔하고 훈련하는 공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완도섬 주봉인 상왕산 법화사 터가 암시하듯, 분명 완도 일대에는 관련 유적들이 장도와 가까운 죽청리 일대나 대야리의 뭍이나 얕은 바다에 남아 있지 않을까. 앞으로 청해진 유적 발굴이 기대된다. 글로벌리즘, 연결과 소통, 포용적 세계관, 애국심 등 현대 디지털 시대에 온 세상을 엮을 새로운 블루 오션의 영감이 샘솟을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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