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배우 설경구의 영화 데뷔작은 ‘꽃잎’(1996)이다. “처음 연기한다는 고등학생이 저리 잘할 수 있다니” 감탄하며 이정현에게 집중해서 그랬을까. 설경구의 얼굴과 연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가 그의 존재를 인식한 첫 영화였다. 친구 사이인 세 미혼 여성의 성에 대한 생각과 행동을 다룬 이 영화에서 설경구는 만화가 역할을 맡았다. 호텔 종업원 연(진희경)과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인물이었다. 6분가량밖에 등장하지 않았으나 느물거리면서도 질척거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 저런 배우가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송어’(1999)를 보고서야 대어를 예감했다고 할까. ‘송어’는 은행원 은수(설경구)가 아내 정화(강수연)와 더불어 산골 양어장에서 친구들과 휴가를 보내면서 벌어지는 섬뜩한 일을 다룬다. 설경구는 신사적이면서 이성적인 듯한데 알고 보면 비열한 인수를 비릿하게 그려냈다. 영화 결말부 은수가 산골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잊자고 정화에게 제안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다. 은수의 차가운 무표정에 중산층의 비겁함이 담겨 있었다.
‘송어’는 ‘박하사탕’의 전주에 불과했다. 누구나 그렇듯 스크린 속 영호(설경구)를 보며 전율했다.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모습만으로도 21세기 초입 영화계는 그의 것으로 여겨졌다. 영호로 먼저 거론된 배우는 한석규였다고 한다. 한석규의 티켓 파워가 강하던 시절이었다. 이창동 감독이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로 호흡을 한 차례 맞췄고, 평가가 좋기도 했으니 한석규 캐스팅은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감독의 부인이 집에서 우연히 오디션 장면을 보고선 설경구를 추천했다고 한다.
설경구의 얼굴은 평이하다. 미남이나 꽃이라는 수식까지 붙이기는 어렵다. 처음부터 배우를 꿈꾸지도 않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재수를 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공부 삼아 무대에 올랐다가 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
설경구를 지금의 설경구로 끌어올린 건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성실은 영화계에서 유명하다. 어느 감독이 전해준 이야기. 그는 설경구와 해외에 나갔다가 다음 작품을 함께 하자는 구체적인 협의를 했다. 설경구는 캐스팅 말이 오가자 마자 식사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안받은 역할은 날렵한 몸놀림이 필요했다. 앞의 감독은 “배우들이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다들 무섭지만, 설경구는 정말 무섭다”고 말했다. 설경구는 지난해 ‘자산어보’ 개봉을 앞두고 이뤄진 화상 인터뷰에서 ‘땀’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데뷔 이후) 변함없이 실천하는 게 늘 땀을 흘리고 촬영장에 가는 것”이라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촬영 시작 3, 4시간 전에 일어나 운동으로 땀을 빼며 잡생각을 떨쳐낸다”고 말했다.
인터뷰로 여러 차례 설경구를 만났고, 운 좋게 술자리에 몇 번 동석한 적도 있다. 인터뷰할 때는 조리 있게 말을 잘하지만 사석에선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짓궂은 면이 있다. 서로 얼굴을 트고 난 후 만났을 때의 일이다. 설경구는 반갑게 웃으며 오른발을 왼쪽으로 향하게 기역자 모양으로 만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두어 차례 반복했다. 기자 이름으로 장난을 건 거였다.
장편영화 출연만 41편. 다종한 작품들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실미도’(2003)의 강인찬,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09)의 한재호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사형수에서 북파 공작원으로 변신한 강인찬은 상영시간 내내 굳은 얼굴로 일관하며 관객의 눈물을 뽑아낸다. 날카로우나 슬픔이 맺힌 설경구의 눈 때문이리라. 강철중은 2000년대 충무로가 내놓은 최고의 캐릭터다. ‘공공의 적’ 시리즈 3편인 ‘강철중: 공공의 적 1-1’(2008)이 나온 지 14년이 됐으나 여전히 4편 제작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재호는 데뷔 30년을 향해 가는 중년 배우가 젊은 세대의 환호를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드문 사례였다.
설경구는 지난달 25일 개봉한 ‘킹메이커’에서 1960~70년대 야당 정치인 김운범을 연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설경구는 김 전 대통령을 흉내 내지 않으면서도 그의 특징들을 가져온다.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2014)에서 김일성의 행동거지를 최대한 따라 하려는 인물 성근을 연기하기도 했다. 김대중과 김일성의 간극. 설경구의 연기 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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