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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들의 끊임없는 청와대 탈피 시도

입력
2022.02.09 16:00
수정
2022.02.09 16:21
24면
0 0

편집자주

이왕구 논설위원이 노동ㆍ건강ㆍ복지ㆍ교육 등 주요한 사회 이슈의 이면을 깊이 있게 취재해 그 쟁점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코너입니다. 주요 이슈의 주인공과 관련 인물로부터 취재한 이슈에 얽힌 뒷이야기도 소개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 청와대 관저를 나와 여민관 집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17년 5월 청와대 관저를 나와 여민관 집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48년 8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저인 이화장에서 옛 조선총독부 인근 일본 총독관저 자리로 거처를 옮기고 건물에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이곳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권력 1번지가 된다. 이후 1960년 윤보선 대통령은 경무대라는 명칭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청와대로 개칭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 본관을 증축한 것 이외에는 큰 틀을 바꾸지 않았다.

청와대 입지에 관심을 갖고 최초로 의미 있는 변화를 꾀한 인물은 전두환 대통령이다. 하야와 망명, 암살 등 청와대 주인들의 운명이 순탄치 않았기에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전 대통령은 풍수상 기가 빠져나간다는 이유로 서향이었던 청와대 본관을 남향으로 변경했다. 경복궁의 후원이었던 청와대 자리는 조선 초 한양 정도(定都) 때부터 흉지(凶地)설이 끊이지 않았다.

후임인 노태우 대통령은 당시 관저가 외빈을 맞기에 협소하다는 이유로 본관에서 서쪽으로 100m 떨어진 지금 위치에 집무와 외빈 접견이 가능한 청와대 본관(1991년)을 신축했다. 본관에서 200m가량 떨어진 별도의 관저도 이때 만들어졌다. 정부 예산이 30조 원 안팎이었던 당시 2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됐는데 임재길 당시 정무수석은 “천년을 두고 길이 보존해야 할 민족문화재”라고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임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청와대 외부에서의 집무, 혹은 아예 청와대를 이전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민주화와 권위주의 해소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정부서울청사 집무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김대중 대통령도 정권 초기 정부서울청사 집무를 추진했으나 경호ㆍ보안 등의 문제로 두 대통령 모두 이를 접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청와대와 정부 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고 수도 이전을 공약했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무산됐다. 작은 청와대를 강조했던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도 청와대 이전안이 검토됐다. 집무실과 비서실, 경호실을 현재 외교부가 쓰고 있는 광화문 서울청사별관으로 옮기고 삼청각 일대에 대통령 관저와 영빈관, 수행원 숙소를 건축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예산 투입, 국회의 승인절차 등을 이끌어낼 결단 부족으로 흐지부지됐다.

이왕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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