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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내를 걷어낸, 진공 포장된 생선 같은 도시

입력
2022.02.12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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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라스베이거스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라스베이거스. 게티이미지뱅크


“필라델피아에서는 퀴퀴한 역사의 냄새가 났다. 뉴헤이븐의 냄새는 무관심이었다. 그리고 볼티모어는 짠물, 브루클린은 햇볕에 데워진 쓰레기였다. 하지만 프린스턴에는 냄새가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깊은 숨을 들이쉬길 좋아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아메리카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아메리카나'의 강렬한 도입부다. 가난을 딛고 미국 유학에 성공한 주인공 이페멜루가 프린스턴에서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건 냄새의 부재다. 나이지리아 출신 대학생인 그녀에게 프린스턴은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운전’하는 주민들과 ‘유기농 식품점’, ‘피망 맛을 포함한 오십 가지 맛을 파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곳으로 요약된다. 이페멜루는 이 부유한 안락의 도시에서 아무런 냄새도 느끼지 못한다.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독자들은 그녀가 말하는 냄새의 의미를 곧장 알아듣는다. 프린스턴에 가본 적 없는 나 같은 독자조차 그렇다. 영화 ‘기생충’에서 우리가 지하철 냄새에 숨은 함의를 본능적으로 간파했던 것과도 비슷하다.

남쪽 만달레이 베이 호텔부터 북쪽 스트라토스피어 타워 호텔까지 이어지는 스트립은 라스베이거스의 동맥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쪽 만달레이 베이 호텔부터 북쪽 스트라토스피어 타워 호텔까지 이어지는 스트립은 라스베이거스의 동맥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냄새 없는 도시. 내게는 오래전 출장차 방문한 라스베이거스의 첫인상이 그랬다. 난생처음 방문한 카지노는 예상외로 쾌적했다. 쾨쾨한 담배 냄새도, 술에 취해 비틀대는 도박꾼도 없었다. 거기서 대박과 쪽박을 결정짓는 건 손때 묻은 지폐가 아닌 깨끗한 플라스틱 칩이었다. 쇼핑몰 천장에 설치된 인공 하늘은 24시간 청명했고, 벨라지오 호텔 앞 인공 분수는 2,000여 개의 노즐을 조율하며 실제 자연보다 더 멋진 장관을 펼쳐 보였다. 30m가 넘는 무대 천장에서 수직으로 다이빙하는 쇼걸은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는 그런 스릴조차 소파처럼 안락했다. 앞좌석 등받이에 물속에서 대기 중인 수십 명의 안전요원을 비추는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쇼걸의 안전을 염려하는 관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마치 도시 전체가 진공 포장된 생선 같았다.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잡내를 모두 걷어낸 초대형 테마파크. 그곳은 5성급 호텔처럼 아늑했다.

호텔처럼 아늑하다는 표현은 그냥 비유가 아니다. 라스베이거스는 크게 특급 호텔들이 모여 있는 스트립(The Strip)과 주거 구역인 다운타운으로 나뉜다. 우리가 아는 ‘도박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는 모두 이 스트립 구역에 속한다. 남쪽 만달레이 베이 호텔부터 북쪽 스트라토스피어 타워 호텔까지 이어지는 스트립은 라스베이거스의 동맥이다. ‘MGM’, ‘미라지’, ‘벨라지오’ 등 이름만 들어도 돈이 줄줄 새 나가는 듯한 고급 호텔들이 약 7km에 걸쳐 촘촘히 들어서 있다. 라스베이거스 관광은 대체로 이 호텔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카지노, 클럽, 레스토랑, 공연장, 쇼핑센터 등 대부분의 볼거리가 호텔 안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이 지역 마피아들이 시에 내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 시 외곽의 사막을 개척해 카지노를 설립한 것이 지금 스트립 거리의 시작이다. 게티이미지뱅크

1940년대에 이 지역 마피아들이 시에 내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 시 외곽의 사막을 개척해 카지노를 설립한 것이 지금 스트립 거리의 시작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라스베이거스는 스트립 구역을 ‘지상 최대의 파라다이스’라고 선전한다. 이 또한 그냥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스트립에서 구글 맵을 켜면 ‘Paradise'라는 지명이 뜬다. 이곳은 시(city)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카운티 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직할구역(unincorporated area)에 속한다. 네바다 주에 도박이 허용되고 도시에 검은 자본이 흘러들던 1940년대에 이 지역 마피아들이 시에 내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 시 외곽의 사막을 개척해 카지노를 설립한 것이 지금 스트립 거리의 시작이다. 그랬던 곳이 세를 확장하면서 라스베이거스와 한 도시처럼 묶여버린 것이다. 관광객들이 찾는 라스베이거스는 대부분 스트립, 다시 말해 파라다이스 구역에 속한다. 이 구역의 치안 중 상당 부분은 마피아 커뮤니티가 고용한 보안요원들에 의해 유지된다. 매캐런 국제공항 안에 카지노가 버젓이 운영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농담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라스베이거스를 두고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에미상과 골든글로브 주요 부문을 휩쓴 HBO Max 드라마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이하 ‘나직코’)은 바로 이 스트립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부분의 미디어가 라스베이거스를 카지노와 쇼걸, 엘비스의 도시로 그리는 것과 달리 ‘나직코’는 매일 밤 전용기를 타고 스트립으로 출근해 호텔에서 쇼를 펼치고 다시 다운타운으로 돌아오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일상을 통해 우리가 한 번도 접한 적 없던 이 거리의 냄새를 전해준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데버라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가발을 벗고 강아지들과 함께 쓸쓸히 밥을 먹는 첫 장면은 이 도시의 빛과 그림자를 암시하는 강렬한 도입부다. 술 취해서 올린 트윗 한 줄 때문에 무대에 설 기회를 잃고 전전긍긍하다 데버라의 작가로 고용되는 에이바는 젠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코미디 업계의 대선배인 데버라와 시시각각 부딪친다. 에이바에게 데버라는 인종차별과 혐오 농담을 일삼는 한물간 ‘노잼’ 코미디언이고, 데버라에게 에이바는 입으로만 페미니즘과 채식을 부르짖는 게으르고 속 편한 젊은이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HBO Max 제공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HBO Max 제공

입심 좋은 두 여성의 티키타카만으로도 이미 ‘꿀잼각’이지만, HBO Max의 최정예 작가진이 숨겨놓은 드라마 속 ‘이스터에그’를 찾는 일도 못지않게 재미있다. 예컨대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네바다 사막에 고립되는 장면은 스트립의 탄생 비화와 관련이 있다. LA의 호텔 사업가 토머스 헐은 사막의 한 도로에서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하던 중 그곳을 오가는 차량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카지노를 구상한다. 이후 4만 평의 땅을 구입한 그는 다운타운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그 황량한 사막 위에 최초의 카지노 모텔 ‘엘 란초(El Rancho)’를 세운다. 1941년 4월 3일, 라스베이거스의 동맥이 뛰기 시작한 순간이다. 1941년에 스트립의 터를 닦은 호텔 사업가와 80년 후 그 거리에 젊은 피를 수혈하러 온 코미디 작가가 둘 다 LA 출신이라는 것 역시 나만 알아서 더 재미있는 디테일 중 하나다.

전용기를 타고 저택과 호텔을 오가는 데버라의 눈 튀어나오게 호화로운 삶이나 특급 호텔에 살면서 프런트 직원에게 치약을 구걸하는 에이바의 아이러니한 일상은 웬만해선 접할 일 없는 타인의 삶이라 더 신선하다.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가 “여기 산다고요? 멋지네요!”라고 감탄하자 에이바는 시니컬하게 응수한다. “네, 그렇긴 한데 멋지기만 한 건 아니에요. 라스베이거스가 어떤지 아시잖아요. 파티를 즐긴 다음 날 최대한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은 일요일 아침 있죠? 삶 전체가 그런 일요일 아침인데 떠날 수가 없어요.”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속 데버라의 인생 곡선은 이 도시의 흥망성쇠와도 맞물린다. 한 시대를 풍미한 라스베이거스는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HBO Max 제공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속 데버라의 인생 곡선은 이 도시의 흥망성쇠와도 맞물린다. 한 시대를 풍미한 라스베이거스는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HBO Max 제공

에이바와 유쾌한 하루를 보낸 남자가 다음 날 아침 호텔 창문을 깨고 자살하는 사건은 ‘나직코’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우울해하는 에이바에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하라”는 속 깊은 충고까지 건넸던 그이기에 그 충격은 배가된다. 파티가 끝난 후의 일요일 아침 같은 도시에는, 카지노에서 전 재산을 잃고 처음 만난 여자와 행복한 하루를 보낸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남자가 있다. 진공 포장된 생선처럼 깔끔했던 도시에 비릿한 죽음의 냄새가 끼어드는 순간이다.

통산 2,500회 공연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데버라는 라스베이거스에 본인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었을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이제는 무대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요즘 관객들은 ‘헬멧 쓴 DJ가 아이팟으로 트는 음악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데버라의 인생 곡선은 이 도시의 흥망성쇠와도 맞물린다. 은퇴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돈을 쓸어 담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라스베이거스는 그러나 1976년 뉴저지 주 애틀랜틱시티에 도박이 허가된 이래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세계 최대 도박도시’라는 지위는 어느덧 마카오로 넘어간 지 오래고, 이제는 백년 가까이 스트립을 지켜온 유서 깊은 호텔조차 직원을 감원하거나 문을 닫는 실정이다.

1997년 개관한 네온 뮤지엄은 실내가 아닌 야외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라스베이거스 거리를 장식했던 네온 간판 200여 개가 보관돼 있다. 라스베이거스 관광청 제공

1997년 개관한 네온 뮤지엄은 실내가 아닌 야외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라스베이거스 거리를 장식했던 네온 간판 200여 개가 보관돼 있다. 라스베이거스 관광청 제공

유흥과 환락의 상징이었던 스트립도 더없이 건전해졌다. 카지노 오너들은 부정적 도시 이미지를 벗기 위해 호텔을 종합 레저타운으로 바꾸고, 가족 단위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중이다. 이제 라스베이거스에 숨을 불어넣는 건 플로리다의 은퇴자들이 아니라 미국 최대 규모로 성장한 컨벤션 사업이다. 세계 전자 제품 전시회 'CES', 아마존웹서비스의 연례 콘퍼런스 ‘AWS 리인벤트' 등 향후 IT 트렌드를 좌우하는 중요한 행사들이 모두 이곳에서 열린다. 트위터를 끼고 사는 젠지 세대와 경제 호황기를 통과한 베이비부머 세대를 겹쳐놓은 ‘나직코’가 라스베이거스를 배경으로 삼은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내 작업실 벽에는 A4 크기의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라스베이거스의 네온 뮤지엄에 전시된 간판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출장 갔다가 관광엽서 사듯 별생각 없이 구입한 것이다. 1997년 개관한 네온 뮤지엄은 실내가 아닌 야외 박물관으로, 이곳에는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라스베이거스 거리를 장식했던 네온 간판 200여 개가 보관돼 있다. 불 꺼진 간판들 아래 깨진 유리 조각과 녹슨 전선이 뒹구는, 다 돌아보고 나면 무덤가에 선 듯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곳이다. 한때 도시를 화려하게 물들였던 간판들이 총 맞은 피에로처럼 가로로 누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샀던 이 사진에서, 나는 이미 라스베이거스의 냄새를 맡았던 건지도 모른다. '아메리카나'의 이페멜루가 흑인 머리 전문 미용실에 가기 위해 프린스턴의 트렌턴을 찾았을 때 처음으로 그 도시의 냄새를 감지했던 것처럼.

강보라(소설가ㆍ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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