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대부분 불행으로 얼룩진 한국 대통령
정권교체가 분풀이되는 낙후한 정치문화
적폐 청산으로 포장한 정치 보복 그만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극한 직업이라는 이야기는 들을수록 블랙 유머라기보다 사실에 가깝게 느껴진다. 초대 대통령이 추방 아닌 추방으로 이국에서 생을 마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1명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 4명이 적게는 징역 17년, 많게는 무기징역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두 명의 대통령은 얼마 해보지도 못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 군인에게 쫓겨났다.
말년이 불행하다 못해 참혹해 역사에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부하에게 살해된 박정희와 검찰 수사로 번민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노무현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적어도 본인이 이런 혹독한 수난을 겪지 않은 경우는 김영삼, 김대중뿐이었다. 퇴임 뒤 외교 사절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강연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먼 나라 전직 대통령들과는 비교할 것도 없는 비정상이다.
물론 전직 대통령에 대한 단죄를 뭉뚱그려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독재 통치나 쿠데타의 죗값은 물어야 마땅하고, 국정농단 등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대통령이라고 피해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보복이 없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것은 군사 독재를 벗어나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지 30년인 우리 정치가 이제는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적 증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바람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진영 논리가 더 커진 측면이 있지만 이런 후진적인 정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 역시 적지 않았다. 권력구조 개편 같은 구조 개혁보다 이 같은 정치 문화 개선이 우리 정치에 더 시급한 과제일지 모른다. 다가온 대선의 유력 주자들도 이에 이론이 없는 듯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난해 말 순천 유세 때 "대통령이 돼서 윤석열 후보를 박살 내달라"는 지지자의 요구에 이렇게 말했다. "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해야 될 일이 산더미인데 옛날 것 뒤져가지고 후벼 파고 처벌하고 복수하고 그럴 시간 있습니까." 그 얼마 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봉하마을에서 문재인 정부 인사들에 대한 보복 조치가 없느냐는 질문에 "정치 보복이라는 것은 정치가 아니고 공작이기 때문에 그런 공작은 안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윤 후보는 민주당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며 적폐 수사를 하겠다고 단언했다. 심지어 그를 위해 많은 이들의 눈에 부적절한 측근 기용으로 비치는 인사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측근을 심지어 "독립운동하듯 해 온 사람"이라고 두둔했다. 발언이 논란이 되자 윤 후보는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은 다르다는 논리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열린 뒤였다.
'정치 보복이 지속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73.2%가 "그렇다"고 답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다들 정치 보복이 멈추기를 원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윤 후보는 안타깝게도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고 말았다.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의 의미는 물론 다르다. 문제는 현실 정치에서 그 경계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적폐 청산으로 여기는 일을 다른 누군가는 정치 보복으로 받아들인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탄핵'이라는 사법적 인증을 얻어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피로감이 쌓인 것도 그 때문이다.
검찰총장을 지낸 윤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자신이 아끼는 특수부 출신 검사들과 함께 누구보다 기술적으로 적폐 청산을 해 낼 것이다. 그런 검찰공화국에서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올리겠지만 반대자들은 다시 쓸개를 씹고 칼을 갈 것이다. 게다가 무리하게 적폐 청산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정당하게 받아들여질 수사마저 보복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다. 나라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는데 여전히 증오와 보복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가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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