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당신에게]
<1>여성을 지운 대선, 현실을 보세요
성별 임금공시·여성장관 등용 공약 후퇴
보수 후보들, '여성' 지우고 '엄마' 정책 집중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 성평등은 인권의 핵심 가치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 2017년 2월 16일)
“제게 성평등은 체화된 부분이다. 집에서 '밥 줘'라는 말을 한 번도 못해봤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2017년 4월 24일)
“여성에 대한 모든 정책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충실하냐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2017년 4월 25일)
“제 삶이 페미니스트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여성의 권리가 획기적으로 신장될 것이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 2017년 2월 23일)
지난 19대 대선에서 여야 유력 대선 후보들은 입을 모아 “성평등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었다. 성별 임금격차 해소, 여성 대표성 확대, 젠더폭력 방지, 일·생활 양립 등 성평등을 위한 정책이 경쟁적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5년 뒤, 20대 대선에서 ‘페미니즘’은 금기어가 됐다. 가장 이슈가 된 ‘성평등 의제’는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이다. 여가부의 어느 정책이 문제인지, 성차별에 대한 구체적 해법은 무엇인지 논하기에 앞서 “더는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진단을 내린 후보도 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여성의 삶이 극적으로 개선돼, 벌써 성평등 사회가 찾아온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의 남녀 차별은 주요 국가 중에서 부동의 1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성별 임금격차 1위(2020년), 직장 내 여성차별 수준을 나타내는 '유리천장' 지수 꼴찌(2021년)다.
한국일보는 114주년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맞아 성평등에 가장 뒤처진 국가이면서도, 여성혐오로 얼룩진 사회에 대해 진단한다. 우선 19대와 20대 대선 주요 후보들의 여성·성평등 공약을 비교해봤다. 막바지에 사퇴한 안철수 전 국민의당 후보도 공약 분석에 포함시켰다.
성별 임금공시제, 그땐 필요했고 지금은?
'누가 돼도 여성 장관 30% 이상… 임금공시제 도입'. 2017년 5월 4일 한 언론사가 보도한 공약 기사의 제목이다.
지난 대선에서 5명의 주요 후보 중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뺀 나머지 4명은 ‘성평등 임금공시제’ 도입을 약속했다. 1992년 OECD 조사 참여 이래 줄곧 '최악의 성별 임금격차' 국가 자리를 유지해 온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성별·고용형태별 임금 현황과 관련 정보를 공개하자는 취지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 당선 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2018년까지 해당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목표가 제시됐지만, 고용노동부가 명칭을 '임금분포공시제(가칭)'로 바꾸고 연구용역을 한 차례 진행한 것 외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공약 실행이 지지부진한 사이, 2020년 남성 평균임금 대비 여성 평균임금은 67.7%로, 5년간 3%포인트(2017년 64.7%) 개선됐을 뿐이다.
이번 대선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고용(성)평등 임금공시제’ 도입을 10대 공약에 포함시켰다. 이 후보는 채용 성차별 사업장 신고·감독, 심 후보는 성평등 담당관 선출 및 성차별 의심기관 불시 감독 등 '성차별 없는 일터' 만들기 대책도 함께 내놨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정책공약집에서 채용 단계별 남녀 성비, 부서별 근로·승진자·육아휴직 사용자 성비 등을 공시하는 '성별근로공시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으나, '임금' 항목은 없었다. 특히 '500인 이상 기업부터 자발적 참여 유도'를 실행방안으로 내세워, 권고 수준이다.
지난 대선에서 '동일임금의 날' 제정까지 약속했던 안철수 전 후보는 이번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여성 장관 30~50%" 약속, 이젠 사라졌다
‘남녀 동수 내각’은 19대 대선의 화두였다. 문재인, 심상정 후보는 여성 장·차관 비율 50%를 약속했고, 보수 성향 후보인 유승민 후보조차 30%에서 시작해 점차 50%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안철수 후보도 30%를 공약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만이 당시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구색 맞추기'라는 비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의사결정 지위에서 배제됐던 여성 인사를 적극 발굴해 대표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였다. 정당명부 비례제 확대를 통한 여성 의원 비중 상향(심상정), 공공부문 여성 관리자 비율 30% 할당(유승민) 등의 공약도 함께 제시됐다.
반면, 이번 대선에서 '남녀 동수 내각'을 공언한 건 심 후보뿐이다. 이재명 후보는 서울신문 질의에 "차기 (민주당) 정부에서도 30% 유지"라는 입장을 밝힌 반면, 윤 후보와 안 전 후보는 아예 '할당제 반대' 의견을 보였다. 다만 안 전 후보는 관훈토론회에서 "내각의 여성 비율이 낮은 만큼, 더 기회를 주고 궁극적으로 양성평등으로 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은 사회의 주요 결정에 여성들이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나라이다. 지난 9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년 한국의 국가성평등지수’에 따르면 여성 차별이 가장 심한 분야가 '의사결정'(100점 만점 중 37.0점)이었다.
21대 국회의 여성 국회의원 수는 57명(19.0%)에 불과하며, 2021년 기준 OECD 평균(31.6%)에 크게 못미친다. 문재인 정부 역대 최고 여성 장관 기용률은 18명 중 6명(33.3%)인데, 딱 OECD 평균(34.0%) 수준이다. 이마저도 정권 말미엔 22.2%로 다시 내려앉았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여성학 박사)은 “인구 절반이 여성인데 정상적인 의회라면 150명이 여성 의원이어야 한다”며 “개인 남성은 가난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지위를 가지지 못할 수 있지만 자신을 대변해 줄 만한 남성이 의회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상당한 권한”이라고 지적했다.
보수 후보들 젠더폭력 공약, 심각한 퇴행
지난 대선에서 주요 후보들은 일제히 젠더폭력 근절 대책으로, ‘젠더폭력방지기본법’(문재인) ‘여성폭력방지기본법’(안철수) ‘여성안전특별법’(유승민) ‘한국형 클레어법’(심상정) 제정을 약속했다. 당시 홍준표 후보만 별다른 공약을 내놓지 않았고, 도리어 "트랜스젠더는 들어봤는데 젠더폭력은 무슨 뜻이냐"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
문재인 정권 동안 여성폭력방지기본법·스토킹처벌법 제정 등 성과가 없지는 않았으나 권력형 성범죄, 군내 성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 해결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단적으로 디지털 성범죄만 봐도, 2021 검찰연감에 따르면 불법촬영, 성착취물 제작·배포 등 관련 사범은 2016년 1만3,566명에서 5년 만인 2020년엔 24% 증가한 1만6,866명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성(젠더)폭력 없는 안전사회 실현’을 위한 정책을 10대 공약에 담은 건 이재명, 심상정 후보뿐이다. 구체적인 정책 내용은 다르지만, 두 후보 모두 디지털 성범죄 대응 강화·피해자 지원, 데이트 폭력 처벌 강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대응 강화 등 광범위한 공약을 내놨다.
윤 후보 캠프는 '청년이 내일을 꿈꾸고 국민이 공감하는 공정한 사회-여성가족부 폐지' 10대 공약의 하위 범주로 '성범죄 처벌 강화·무고죄 처벌 강화'를 제시했다. 여가부 폐지 등을 '청년 공약'으로 내건 것은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를 겨냥한 것이다. 특히 성범죄에 대한 무고는 그 특수성을 고려해 관련 조항을 신설하겠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을 막고 위축시키는 용도로 자주 악용되는 무고죄를 성범죄에서만 특별히 강화할 필요가 있을까. 현행법상 무고죄(형법 156조)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며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주요 국가보다 두 배 이상 형량이 높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KWDI)의 ‘성폭력 무고죄 검찰통계 분석’에 따르면 성범죄가 68건 접수될 때 성범죄 무고는 1건 접수된다. 더구나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성폭력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는 경우, 84.1%는 '무고 무혐의'로 불기소됐다. 또 성범죄 무고 피고인이 무죄를 받은 비율(5.1~7.0%)은 전체 형사 범죄 무죄율(1% 안팎)보다 훨씬 높았다.
특히 2020년 성폭력 범죄 검거인원(대검찰청 범죄분석 통계)은 3만1,952명(남 3만603명)이었는데 같은 해 기준 '흉악 강력범죄'(살인·강도·방화·성폭력)의 91%가 성범죄일 만큼 한국의 성범죄는 심각하다.
윤 후보의 경우 보호수용·전자감독제 대상이 되는 '흉악 성범죄자'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으나, 불법촬영·데이트 폭력 등 '일상적 성범죄' 근절 대책은 없었다. 다만 '윤석열 공약위키' 사이트에 디지털 성범죄, 교제폭력, 스토킹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을 강화한다는 구상 정도가 담겼다.
안 전 후보는 당초 지난해 11월 "성적 자기결정권을 위한 '비동의 강간죄 원칙'에 따라 성범죄를 엄벌하겠다"고 공약했으나, 2030 남성 반발로 철회했다. 10대 공약엔 아예 '남성' '여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빠졌다.
현 강간죄 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에 '동의 여부'를 추가하는 형법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발의된 상태인데, 명시적으로 찬성 의견을 밝힌 건 심 후보뿐이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는 국제앰네스티 질의에 '일부 추진'이라는 유보적 입장을 밝혔다.
'여성'은 사라지고, '엄마' 정책만
두 보수 성향 후보가 '여성의 삶'과 관련해 10대 공약에서 집중한 대목은 '임신·출산·양육 국가책임 강화’(윤석열), ‘출산~보육 국가책임제’(안철수)였다.
윤 후보는 특히 여가부 폐지에 대해 성평등 대신 "아동·가족·인구감소 문제를 다룰 부처를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여성의 존재 가치를 출산으로 한정하는 대목이다. 그는 ‘임신·출산 전 성인 여성 건강검진 지원 확대’ '임신·출산 관련 치료비 지원 확대' '산후조리 국가지원' 등 정책을 통한 '출생률 회복 기대'를 목표로 제시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비혼 여성과 기혼 여성을 갈라치기 해 결혼해서 애 낳은 여성만 챙기겠다는 세분화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당신에게
<1회>여성을 지운 대선, 현실을 보세요
<2회>여혐 기사, 미러링 해봤다
<3회>알고 보면, 당신도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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