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일상 유지하며 군사훈련 등 전쟁 대비
우크라 예비군 동원령… 나토 동유럽 병력 증강
군사 전문가 "우크라 항전하면 러시아도 곤경"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파병을 예고하면서 유럽에 화약냄새가 진동하고 있지만, 정작 우크라이나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하다. 여전히 출퇴근 시간이면 수도 키예프 거리는 직장인들로 붐비고, 공황에 빠져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사람도 없다. “우크라이나는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도 주민들은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다. “러시아 군대는 오래전부터 동부 돈바스 지역에 주둔해 왔다. 이전과 달라진 건 없다. 푸틴 연설 덕분에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 현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22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이 전한 키예프 풍경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전쟁은 일상이다. 2014년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이 동부 돈바스를 장악한 이후 저강도 내전이 8년째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단련이 돼 있다는 얘기다. 주민들은 일상을 유지하는 와중에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에도 대비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 맞서 지난 수개월간 많은 주민들이 각 지역 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아 왔다”며 “자기방어를 위해 무장하는 주민들도 많아서 키예프 시내 군사용품점은 이미 동났다”고 전했다.
다만 러시아군 진입으로 고강도 전쟁으로 비화할 우려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23일 예비군 소집령을 내리고, 민간인 총기 소지도 허용하기로 했다. 외출과 야간통행 등을 제한하는 국가비상사태도 선포한다. 러시아 체류 자국민에겐 즉시 철수를 권고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영토를 러시아에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진 드미트리 쿨레바 외무장관도 “플랜A는 긴장 억제를 위해 모든 외교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지만, 만약 실패할 경우 플랜B는 우리 영토를 지키기 위해 이길 때까지 싸우는 것”이라며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CNN 인터뷰에서는 “1994년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한 대가로 미국이 제시한 안전보장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하며 더 강력한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를 요구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군사력은 러시아와 비교도 안 되게 약하다. 러시아가 침공을 개시하면 키예프가 함락당하는 건 시간문제다. 영국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현역 군인은 19만6,600명, 민병대를 포함한 예비군은 90만 명 규모다. 반면 러시아는 현역 군인만 90만 명, 예비군은 200만 명에 달한다. 우크라이나군 무기는 탱크와 장갑차 같은 지상전투용이 대부분이지만, 러시아군은 탄도미사일만 500기 이상 갖고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쉽게 굴복할 것 같지는 않다. 군사 전문가들이 러시아가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막대한 점령 비용을 치르며 곤경에 빠질 것이라 보는 이유다. 존 나글 미육군 대학원 객원교수는 이날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수는 있지만 흡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전쟁은 푸틴 대통령에게도 재앙을 가져오는 자충수가 될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나글 교수는 그 이유로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영토가 넓어 러시아가 물리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또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회원국인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와 육로로 이어지고 흑해도 접하고 있어 충분히 군사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이미 나토는 각종 첨단 무기로 우크라이나를 에워싸고 있을 뿐 아니라 병력 추가 배치도 추진하고 있다.
나글 교수는 “항전이 시작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아프가니스탄이 될 것”이라는 진단도 내놨다. 과거 소련은 1979년 아프간을 침공했으나 10년간 전쟁 비용 840억 달러(약 100조 원)를 쏟아붓고 병력 5만 명을 잃은 채 1989년 철수했다. 아프간 전쟁 패배는 소련 붕괴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심지어 미국도 끝내 탈레반을 제압하지 못하고 지난해 8월 쫓기듯 철군했다.
러시아 내부 여론도 문제다. 이달 11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조지워싱턴대와 위스콘신대 등이 지난해 12월 러시아 국민 3,2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쟁을 지지한다는 답변은 8%에 불과했다. 또 푸틴 대통령이 서방을 동맹(39%)과 친구(11%)로 여겨야 한다는 응답이 절반에 달했다. 나글 교수는 “아프가니스탄 철수 같은 상황이 재현돼 러시아 여론이 악화하고 그러다 민주주의 물결이 거세진다면 푸틴 정권도 끔찍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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