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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쌓이는...'처음의 도시' 인천

입력
2022.02.26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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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인천 개항동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월미도에는 국내 유원지를 대표하는 월미놀이공원이 있다. 인천 중구 제공

달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월미도에는 국내 유원지를 대표하는 월미놀이공원이 있다. 인천 중구 제공

여행지에서 아침에 러닝을 하는 건, 오래지 않은, 그러나 꽤나 중독돼버린 습관이다. 특히 항구 도시에 가면 더욱 그렇다. 전날 밤 여흥을 즐기던 해안의 번화가를 인적 없을 때 뛰어보는 일이 꽤나 쓸쓸하고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방한 마스크를 한 채 선글라스를 끼고 비오듯 땀을 쏟으며 뛰는 나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낭만 한 방울도 없는 스릴러의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지난 1월의 어느 늦은 아침, 나는 인천시 중구 개항동에 있는 한 호텔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나와 한 십 분 정도 뛰었을까. 월미공원이 나왔고, 월미공원을 지나 조금 더 뛰자 두둥, 하고 바다가 등장했다. 연휴의 시작이고 아직 오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그러나 아주 이른 아침은 아니라, 소라 봉지를 든 사람들이 디스코 팡팡과 바이킹이 있는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다. 나는 문득 어딘가에서 이와 비슷한 해변을 본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해변이 어디인지는 떠올리지 못하고, 그와 비슷한 해변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만 생각나 열심히 두더지처럼 기억을 헤집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생각이 났다. 루이 말의 1980년작 ‘애틀랜틱 시티’에서 본 바로 그 해변이었다.

월미공원. 50년간 시민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개방되어 숲길 산책로로 이용된다. 인천 중구 제공

월미공원. 50년간 시민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이제는 개방되어 숲길 산책로로 이용된다. 인천 중구 제공

애틀랜틱 시티는 여러 부침을 겪었다. 서울로 치면 필라델피아에서는 아산 정도, 뉴욕시에서는 대전 정도 거리라, 도시는 이미 1850년대부터 리조트 타운이었다. 1874년까지 기차로 애틀랜틱 시티를 찾은 사람의 수는 연간 50만 명. 이미 잘나가던 휴양지가 거대한 호황의 쓰나미를 맞은 건 금주법 시대에 들어서다. 애틀랜틱 시티의 리더들은 1920년부터 시행된 미연방의 금주법을 무시했다. 단체로 금주법을 어기는 일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들이 이 도시의 권력층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미국 동부의 애주가들을 위한 피난처로 부상한 애틀랜틱 시티는 술이 금지된 시대에 마음껏 술을 팔며 ‘세계인의 놀이터’라는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1933년 미연방의 금주법이 사라지며 독점의 시기는 끝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1960년대까지 도시의 쇠락은 점차 가속화됐다. 자동차의 발달로 대도시 근교에 작은 휴양지들이 생기고, 항공편의 발달로 마이애미와 바하마 등의 먼 거리에 있는 대형 리조트 타운이 인기를 끄는 등의 이유였다. 거주민들은 가난해졌고, 도시엔 범죄가 들끓었다.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도박이었다. 1972년까지 미국에서 도박을 합법화한 주는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서부의 네바다뿐이었다. 그해 애틀랜틱 시티가 속한 뉴저지주는 주민투표로 도박을 합법화하며 동부의 슬롯머신을 자처하고 나섰다. 도시의 이름을 그대로 딴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애틀랜틱 시티의 호황기를 상징하는 트레이모어 호텔이 폭파되는 장면을 찍은 실제 1972년 촬영 필름이 삽입됐다.

영화 속에서 20대의 수잔 서랜든이 맡은 여주인공 ‘샐리’는 캐나다의 깡시골인 서스캐처원에서 도망쳐 애틀랜틱 시티에 왔다. 그녀는 빈곤 지역의 다 낡아빠진 아파트에서 연수익 2만 달러의 카지노 딜러를 꿈꾸며 고군분투한다. 버트 랭카스터가 맡은 남주인공 ‘루’는 깡패들이 도시를 지배했던 금주법 시대의 상징인 퇴물 건달로 나온다. 인물과 이야기가 도시가 가진 역사의 단면을 완벽하게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또 있다. ‘산책로’라고 번역해버리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최대 16m의 폭으로 8㎞나 뻗어 있는 애틀랜틱 시티의 ‘보드워크’가 이 도시와 영화의 척추고 심장이다.

1930년대에는 월미도에 바닷물을 데워 목욕을 즐기는 한국 최초의 조탕과 인공해수풀장이 개장했다. 인천 중구 제공

1930년대에는 월미도에 바닷물을 데워 목욕을 즐기는 한국 최초의 조탕과 인공해수풀장이 개장했다. 인천 중구 제공

월미도 역시 여러 부침을 겪었다. 지금의 인천역 앞에서 월미도에 이르는 1㎞가량의 둑길이 완성된 건 1922년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둑길을 따라 벚꽃놀이며 해수욕을 즐기러 다녔다고 하니 100년의 휴양지인 셈이다. 1930년대에는 월미도에 바닷물을 데워 목욕을 즐기는 한국 최초의 조탕과 인공해수풀장이 개장했다. 해변의 가장자리에 마치 바닷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용궁각이 지어졌고, 인근엔 3층짜리 목조건물인 ‘하마 호텔’이 외국인과 일부 부유층을 대상으로 성황리에 영업 중이었다. 당시에 월미도 유원지를 찍은 사진을 보면 2000년대 해밀턴 호텔의 풀장이 떠오를 정도로 세련됐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별건곤’의 한 르포르타주 기사는 월미도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적는다. “온천 입구까지 늘어 있는 상점에서 조개 껍질이며, 소라 껍질이며, 여러 장난감과 그림엽서를 팔고, 양복 입은 청년과 아사면 치마를 입고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자가 물건을 사는 체하며 서로 흘끗거리며 얼굴을 확인하는데, 딱 보니 ‘연뽀연걸’이다.”(필자 의역) ‘연뽀연걸’은 여기서 ‘연애하는 뽀이와 연애하는 걸’을 말한다. 그다음 문장에 ”결혼도 약혼도 아니한 처녀가 하이 카라 청년과 함께 다니는 새로운 광경”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당시 결혼도 하기 전에 감히 연애를 일삼는 연뽀와 연걸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월미도에서나 볼 수 있는 신인류였으리라. 일제강점기에 최신 인류들이 찾던 월미도는 해방과 한국전쟁의 시기에 급격하게 쇠락했고, 1970년대에 들어와 허술한 카페와 횟집들이 조금씩 들어서며 숨통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인천 월미도의 명물 디스코 팡팡. 한국일보 자료사진

인천 월미도의 명물 디스코 팡팡. 한국일보 자료사진

월미도 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되살아난 것은 1989년 7월의 일이다. 사업비 8억여 원을 들여 카페와 횟집이 즐비한 해안인접도로 840m를 차량이 통행할 수 없는 산책로로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1992년 9월에 개장한 마이랜드가 한몫했다. 동네 여고생들의 아이돌 스타였다는 디스코자키들의 독무대 디스코팡팡과 어떤 놀이공원의 그것보다 스릴이 넘친다는 바이킹이 인기를 끌며 서울과 경기 서부권에서 유명해졌다. 2000년대 이후 월미도는 월미도를 포함한 개항장 구도심과 함께 서서히 쇠락하고 있다. 개항동 영국영사관 터에는 오랜 시간 개항장 지역을 상징하는 특급 호텔 파라다이스 시티 인천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파라다이스 그룹은 영종도에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을 지으며, 이 호텔의 이름을 ’올림포스 호텔‘로 바꿔 달았다. 영종도와 송도에는 새로운 호텔들이 들어섰고, 올림포스 호텔은 2019년 영업을 중단했다.

길이 770m, 폭 20m에 달하는 월미도 산책로에는 ‘문화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천 중구 제공

길이 770m, 폭 20m에 달하는 월미도 산책로에는 ‘문화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천 중구 제공


월미도에서 애틀랜틱 시티의 해변이 떠오른 건 해변을 내려다보는 널찍한 산책로 때문이다. 길이는 770m, 폭 20m에 달하는 월미도 산책로에는 ‘문화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거리는 수면에서 2~3m쯤 올라서 있어 애틀랜틱 시티의 보드워크처럼 바다를 내려다보는 특이한 경관을 선사한다. 그러나 두 해변이 닮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보드워크 맞은편에 늘어선 비슷한 메뉴에 이름만 다른 가게들, 영업을 아직 준비하고 있지 않거나 그만둔 몇몇 업장들, 거리 뒤편으로 한 블록만 돌아 들어가면 쉽게 눈에 띄는 비어있는 건물들, 오래되어 색이 바랜 모텔의 간판과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은 나지. 그런 인상이 뒤섞여 한때를 풍미하고 조용히 쇠락해가는 스산한 이미지를 완성해낸다. 물론 저녁이 짙어지면 지금도 월미도는 불타오른다. 젊은이들은 조개를 굽고 회를 먹고 소주를 마시고, 디스코팡팡이 팡팡 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늦은 아침에 본 월미도의 쓸쓸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국내 최초의 짜장면집인 인천 '공화춘'. 인천 중구 제공

국내 최초의 짜장면집인 인천 '공화춘'. 인천 중구 제공

나는 어차피 쇠락이란 ‘처음의 도시’가 몇 번이고 겪어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군산이 그렇고 목포가 그렇다. 월미도가 속한 북성동은 송월동과 통합되어 이제는 개항동이다. 개항동, 전동, 송월동, 항동, 동인천동, 신포동은 월미도 지역을 제외하면 지도 위에 응봉산을 중심으로 그린 반경 1.4㎞의 작은 원 안에 모두 들어간다. 이 지역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개항의 흔적이다. 이 공간에선 웬만하면 다 처음이다. 서울 사람들은 한국 최초의 인공해수풀장에 가려면 한국의 철도가 탄생한 경인선 인천역에서 내려야 했다. 서울사람들은 목욕을 하고 개항장으로 나들이를 나가 신포동이나 용동에서 냉면을 먹거나 공화춘에서 한국 최초의 짜장면을 먹었다.

당시 인천 최초의 평양냉면집인 평양옥 등은 배달이 많아서 ‘중머리’라 불리던 냉면 배달부들이 ‘냉면 대접을 겹쳐 놓은 널찍한 목판을 어깨에 이고 한손으로 자전거를 끌며’ 배달에 나섰다. 심지어 가끔은 서울에서 대량 주문이 들어와 기차로 배달을 하기도 했다. 배달의 민족 시대의 이야기가 아닌 1920년대의 증언이다. 쫄면의 탄생에는 수많은 설이 있지만, 냉면 혹은 짜장면을 만들던 동인천 인근 제면 업체에서 탄생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체인점으로 유명한 신포우리만두에서 1980년대에 쫄면을 처음으로 메뉴에 올려두고 팔기 시작하며 쫄면의 대중화가 시작됐다는 사실에도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의 모습. 인천 중구 제공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의 모습. 인천 중구 제공


1888년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각국 공원이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개항동 차이나타운 초입에는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이 있다. 1903년에는 102명의 한국 최초 해외이민자들이 제물포 항에서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제물포항은 지금의 월미도와 개항동 사이에 있는 인천항의 옛 이름이다. 이때 하와이로 건너간 교민들이 해방 후 성금을 보태 인천하와이대학교, 즉 인하대학교를 설립했다는 사실은 인하대학교 학생들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인천은 물가가 저렴한데, 인하대학교 앞이 특히 그렇다고 한다. 민족고대, 해방연세 따위의 지나치게 이념적인 구호들이 난무할 때 인하대학교는 ‘가격인하’로 불렸다고 한다. 술값이 가장 쌌기 때문이다. 처음의 도시에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쌓인다.

박세회 (소설가·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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