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베트남 관광·방역의 불편한 동거
편집자주
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지난달 25일 '2022년 베트남 국가관광의 해' 선포식이 열린 중부 꽝남성(省) 호이안 메모리 아일랜드에는 설렘과 자신감이 공존했다. 은은한 불빛을 밟으며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와 모자 '농'을 쓰고 나타난 현지 여성들과 목조선 위에서 신명 나게 북을 치는 청년들. 이들 모두 2년 만의 관광산업 재개에 들뜬 표정이 그득했다.
"유명한 호이안(Hoi An) 구도시, 미손(My son) 유적지만이 아니다. 꽝남성에는 바이머우(Bay Mau) 코코넛 숲 등 해외 관광객들을 만족시킬 새로운 여행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도안반비엣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의 개회사에도 힘이 넘쳤다. 오는 15일부터 본격화할 외국인 격리면제 정책이 '신흥 관광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같은 날 수도 하노이 역시 '관광 부흥'을 자신했다. 당띠흐엉장 하노이시 관광부장은 "지난해 2만5,000명이 몰렸던 바비(Ba Vi)산 '야생 해바라기 축제'는 물론 '장미ㆍ머틀 축제'도 곧 국제 관광상품으로 내놓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올해 하노이 등 베트남 주요 관광지에선 중앙정부가 주관하는 10여 개의 대형 관광 이벤트도 열린다. 63개 지방정부 또한 지지 않을 생각이다. 이들은 182개의 크고 작은 행사를 통해 독자적으로 국제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이다.
베트남의 최종 목표는 올해 전국적으로 해외 관광객 500만 명 이상을 유치해 157억2,000만 달러(한화 18조9,300억 원)의 경제 파급 효과를 얻는 것이다. 방향성은 명확하다. 멋진 자연경관 속에서 다양한 베트남 문화 상품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녹색 관광(Green Touris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지친 전 세계인의 불안과 피로를 베트남이 씻어내 주겠다는 의미다.
최악의 방역 위기, 인구 0.5%도 책임 못지는 정부
'관광의 해' 자축의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26일, 하노이의 겨울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서늘하고 스산했다. 거리엔 오토바이와 차량의 빼곡한 행렬 대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베트남의 명물 '목욕탕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던 대로변 식당들 또한 대다수 문을 닫았다. 지난해 11월 1일 기준 일주일 평균 확진자 수가 38명에 불과하던 도시가 넉 달 새 7,763명까지 폭증한 탓이다.
현지 보건계는 실제 확진자 수가 정부 발표치의 최소 3배, 최대 10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뜩이나 부족하고 열악한 하노이의 치료 및 격리시설은 지난해 연말 이미 가득 찼다. 이 사실을 잘 아는 현지인들은 이젠 확진이 되더라도 신고 없이 자가 격리로 삶을 버텨낼 뿐이다. 2일 현재 하노이 확진자의 95%는 자가 치료 중이다.
코로나19 자가진단키트와 경구용 치료제(몰누피나비르)도 턱없이 부족하다. 하노이 보건국이 지난달 말 긴급 보급한 몰누피나비르는 5만2,000회분에 불과하다. 현재 하노이 인구는 900만 명, 누적 확진자는 27만2,187명이다. 시정부가 전체 인구의 0.5%, 확진자의 18%가량만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국가 아닌, 4대 사원 신에 의지하는 시민들
하노이를 무겁게 짓누르는 불안과 불만은 구도심에 위치한 탕롱(하노이의 옛 이름) 4대 사원에서 날것의 모습으로 확인된다. 서기 1010년 리 왕조가 수도의 동서남북을 각각 수호하라는 의미로 지은 네 개의 사원은 현재까지 고유의 신 혹은 전설과 함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긴 시간을 함께한 만큼 시민들의 4대 사원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중국의 침탈, 프랑스 식민시대와 베트남전 등 근현대사의 수많은 굴곡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공간의 힘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4대 사원 중 최근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북부를 수호하는 꽌타인(Quan Thanh) 사원이다. 이 사원의 수호신인 후엔띠엔쩐부(Huyen Thien Tran Vu)는 사람들이 악령과 악마를 쫓아낼 때 도움을 주는 존재로 유명하다. 사원을 찾은 지난달 24일과 26일, 현지인들은 사원 중심에 위치한 높이 3.96m의 거대한 부(Vu) 동상 앞에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원에서 만난 시민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울했다. 물류회사에 재직 중인 쑤언(42)씨는 "정부도, 병원도 '지금 당장 조치할 것이 없다'고만 한다"며 "나흘 전 확진 판정을 받은 장모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수호신 부에게 보살펴 달라고 비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쑤언의 부인과 처제는 더 격앙된 말들을 쏟아 냈다. 이들은 "버티기도 힘든 시절인데 시의 국제관광 홍보행사에 자원봉사를 하라는 명령을 최근에 받았다"면서 "당신 같은 외국인들이 이곳의 현실을 모두 알고 난 뒤에도 과연 여행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동쪽을 지키는 박마(Bach Ma) 사원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사원은 리 왕조가 도성을 만들 당시 외곽 성벽이 무너지지 않을 지점을 알려 준 백마(白馬)의 전설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던 조리사 흐엉(39ㆍ여)씨는 "중학생 아들이 지난달 등교 재개 이틀 만에 확진 판정을 받았다"며 "현재 같은 반 친구의 절반이 감염됐다는데 앞으로 아들을 학교에 보내야 할지 혼란스러워 사원을 찾았다"고 토로했다. 천 년 전에도 그랬듯, 백마가 가족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길을 보여주길 바랐던 것이다.
서쪽의 보이푹(Voi Phuc), 남쪽의 낌리엔(Kim Lien) 사원에는 시민들의 '저항'과 '재건'의 의지가 투영되고 있다. 중국 송나라의 침공을 막아 낸 린랑 왕자를 기리는 보이푹 사원에선 "전염병 확산을 막아 달라"는 시민들의 절실함이 가득했다.
같은 시간 낌리엔 사원은 까오손다이브엉(Cao Son Dai Vuong) 신에게 향하는 구조신호가 메아리쳤다. 브엉 신은 리 왕족 쯔엉득이 반란을 퇴치하고 왕위에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했던 신이다. “이제 반란은 없으니 그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도와달라.” 기댈 곳 없는 시민들의 기도는 그렇게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여행 결정은 개인의 몫, 방역 현실은 직시해야
민심의 거센 이반에도, 베트남 중앙정부는 우직할 정도로 ‘버티기’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만 증가했을 뿐, 백신 접종이 충분히 이뤄지고 있고 중증환자 및 사망자 수는 줄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앙정부는 지난달 27일 처음으로 베트남 전체 일일 확진자가 10만 명을 넘었을 때도 담담했다. 오히려 보건당국은 같은 날 "2주 정도 확산세가 이어진 뒤 정점을 찍고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그 2주 뒤는 베트남의 국제관광이 전면 재개되는 시점이다.
부족한 방역 역량과 악화된 감염 상황은 인정, 그러나 이 또한 곧 지나갈 테니 잠깐 왔다 갈 당신들이 알아서 선택해라. 굳이 말로 하진 않았어도 지금까지 베트남의 모든 행동은, 그들의 진심이 여기에 있다고 웅변하고 있다.
방역정책 변화 이후 여행의 선택은 오롯이 개인의 영역이다. 베트남 시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을 받든 정부가 무능하든 천혜의 자연환경이 변할 까닭은 없다. 돌아다니지 않고 독립된 리조트에서만 지낸다면 감염 가능성도 낮을 수 있다.
다만 변치 않을 '녹색'의 자연과 달리 '외국인 방역 안전'을 완전히 보장받을 수 없다는 점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코로나19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한국은 교민사회가 국립중앙열대병원 등과 의료지원 협약을 맺은 상태지만, 현재 해당 병원은 외부 인원을 수용할 여력이 없다.
"브엉 신이 기도에 어떤 대답을 주었나." 낌리엔 사원 앞에서 던진 질문에 목재 벌목공 라우(52)씨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4대 사원 신들은 사태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모두 알고 있다"며 "답을 바로 듣지 못해도, 우리는 기도로 그저 오늘을 이겨낼 용기와 차분함만 받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우문(愚問)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현답(賢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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