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호크마 샬롬'은 히브리어로 '지혜여 안녕'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헌으로 불리는 잠언과 전도서, 욥기를 중심으로 성경에 담긴 삶의 보편적 가르침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합니다.
대체 어떤 명분이 미사일 파편에 찢긴 어린 딸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적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아들은 그 명분이 정말 자기 자신의 것일까? 탱크에 짓밟힌 아이 때문에 치를 떨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정말 그들의 것이어야 했을까? 복수심이 차올라 적군에 달려드는 젊은이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정확히 알고 있을까? 도대체 세상의 어떤 명분이 감히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앗아가도록 몰아가는 걸까?
관에 실려 돌아오면 엄숙하게 맞이하고 나팔을 불어주며 좋은 곳에 묻어 애국자로 기려준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살덩이가 떨어지고 머리가 갈라지며 창자가 터져 나와 죽는 전쟁에 정당한 명분을 답해주는 것일까? 설마 머릿속 이데올로기나 발밑에 흐르는 천연가스가 애국의 명분일까?
그토록 전쟁을 해야 했다면 푸틴과 바이든 둘이서 특설 링을 만들고 싸우든지. 아니면 나토군과 러시아군이 어느 무인도에 집결해서 한바탕 붙든지. 전쟁을 부추기는 경제적·정치적 이해 당사자들이 지하 클럽에서 만나 겨루기를 하든지. 어째서 애꿎은 젊은이들을 살벌한 전쟁터로 던져 놓고 자기들은 소파에 앉아 그들이 피 흘리는 광경을 게임하듯 실시간 영상으로 보고 있는지. 그 반대가 되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인류는 언제쯤이면 고상해질 수 있을까? 1차도 모자라 2차까지 끔찍한 대전을 치른 인류는 그 충격에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거의 저버리기에 이르렀다. 핵이 충만하게 장착된 3차 대전까지 겪고 나면 인류는 정신 차릴까? 그러고 나면 전 인류가 각성하여 사람 손에 총 들게 하는 정치인은 지구 밖으로 보내버리기로 결의하게 되길 소망한다. 사실 성경은 그런 날이 오기를 앙망한다.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2:4
그런데 성경은 그때가 역사의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유쾌한 말은 아니지만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 규정한다. 인간이 죄인인 증거는 여러 가지다. 거짓말을 하고 미워하며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런데 성서는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죄 하나를 또렷이 부각한다. 첫 인간이 원죄를 범한 직후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형제가 형제를 폭력적으로 살인한 사건이다. 아담과 이브의 아들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인간이 죄인인 증거는 형제가 서로의 생명을 짓밟는 것에 있다.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전쟁을 멈추어 본 적이 없다. 전쟁의 결과는 저주다. 첫 살인의 피가 땅을 적신 후 하나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창 4:11
그 저주의 탓인지 인간은 폭력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는 문화에 열심이다. 19금은 아름다운 신체에는 과하지만 신체를 해하는 폭력에는 관대하다. 더군다나 총이나 칼을 어떻게 장난감으로 만들어 팔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가지고 놀면서 도대체 뭐하는 흉내를 내라는 걸까? 이제는 전쟁을 실시간 영상으로 봐도 끔찍하지가 않다. 더 흉측한 전쟁을 게임에서 해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임이 확실하다.
한 생명은 한 우주다. 한 사람이 죽으면 전 우주가 죽는 것이다. 전쟁을 도모하는 자는 생명과 우주와 신을 저주하는 자다. 전쟁의 이상에 전쟁의 현실이 호도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 애국이라는 진통제가 없으면, 평화란 당신도 죽어야만 얻게 될 축복이 될 것이다. 위로는 이것뿐이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전도서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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