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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주택가로 날아든 불씨… "대낮인데도 한 치 앞이 안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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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주택가로 날아든 불씨… "대낮인데도 한 치 앞이 안 보였어요"

입력
2022.03.06 19: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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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동해 산불 피해' 동해시 묵호진동 르포>
소방 여력 없어 주민·외지인 초기 진화 사투
하루 만에 잔불 정리… 산불 여전해 안심 일러
나고 자란 집 잃어버린 주민들은 '망연자실'

6일 오전 전날 화재로 전소된 주택에 살던 주민의 사위인 황국진(59)씨가 건물 옆 잿더미를 뒤지고 있다. 나광현 기자

6일 오전 전날 화재로 전소된 주택에 살던 주민의 사위인 황국진(59)씨가 건물 옆 잿더미를 뒤지고 있다. 나광현 기자

"화재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분명 낮 시간이었는데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죠."

6일 강원 동해시 묵호진동에서 만난 한정숙(64) 5통장은 전날 삶터를 덮친 화마(火魔)를 떠올리다가 "정말 말도 못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날 새벽 강릉시 옥계면에서 시작돼 최대 초속 20m의 강풍을 타고 남쪽 동해시로 번진 산불은 급기야 주택가로 불씨를 날려 주민들의 보금자리를 집어삼켰다.

묵호진동은 또 다른 시내 북쪽 마을인 망상동과 함께 민간, 펜션 등 건물 70여 채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관광객들까지 초기 진화를 거들어준 덕분에 이곳 주민들은 하루 만에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산불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어 안심하기엔 이른 상황이다.

양동이로 물 퍼가며 고군분투… 급박했던 상황

6일 오전 전날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한 펜션의 모습. 검게 그을린 건물 외벽 뒤로 묵호항이 보인다. 나광현 기자

6일 오전 전날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한 펜션의 모습. 검게 그을린 건물 외벽 뒤로 묵호항이 보인다. 나광현 기자

주민들에 따르면 묵호진동 주택가엔 전날 오전 10시쯤부터 바닷가쪽 야산에서 거센 바람을 타고 불씨가 날아들었고 낮 12시쯤 본격적으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연기가 시내를 덮쳤고, 갑작스러운 재난에 주민들은 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몸을 피해야 했다. 김모(68)씨는 "아파트 베란다 창문으로 봤는데 뒷산에서 순식간에 빨간 불이 타고 내려왔다"며 "그걸 보자마자 혼비백산해서 다들 가방 하나씩만 챙겨 급하게 도망나왔다"고 말했다.

무수한 화재 신고에도 소방관들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마침 동해안을 포함한 각처에 동시다발적으로 대형 산불이 발생한지라 출동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당장은 주민들이 직접 화재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한정숙 통장의 말이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까지 힘을 합쳐 30여 명이 소방인력이 올 때까지 호스로 물을 뿌렸습니다. 다른 통장님은 주민들과 양동이로 물을 퍼서 호스가 닿지 않는 곳에 불을 끄러 다녔죠." 드디어 오후 1시쯤 소방대가 당도했고 오후 5시쯤 큰불이 잡혔다.

화마가 할퀴고 간 마을… "인명피해 없어 다행"

6일 오전 전날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주민 이형국(50)씨의 집 전경. 까맣게 타버린 가재 도구들이 방 안에 그대로 놓여 있다. 나광현 기자

6일 오전 전날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주민 이형국(50)씨의 집 전경. 까맣게 타버린 가재 도구들이 방 안에 그대로 놓여 있다. 나광현 기자

6일 오전 묵호진동 주택가 곳곳에선 소방관들이 갈퀴로 수증기가 오르는 잿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혹시 모를 잔불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으로, 그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날도 여전한 강풍이 불라치면 전소된 건물의 회색 잿가루가 날아들었다. 검게 그을린 외벽과 재가 쌓인 공터, 저멀리 검게 타버려 민둥해진 야산, 기둥마저 무너져 훤히 드러난 건물터도 전날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었다.

주민들은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몸서리쳤다. 전날 화재로 나고 자란 집이 사라졌다는 이형국(50)씨의 표정은 특히 씁쓸했다. 흔적만 남은 집터 뒤로 보이는 방안엔 이불, 가구 등 가재도구들이 하나같이 새까만 잿더미로 변했다. 이씨는 "어릴 적부터 기반을 다진 집이라 최선을 다해 지켜보려 했지만, 가스통 폭발 우려도 있고 인명 피해가 날까봐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속한 주민 대피로 인명 피해가 없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모가 살던 집이 모두 타버려 수습하러 왔다는 황국진(59)씨는 "장모님이 새벽에 주무실 때 불이 났으면 큰일날 뻔했다"며 "사람이 무사하니 됐고, 불탄 집은 다시 지으면 되지 않겠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가 오면 좋을 텐데"… 동해 화재는 현재 진행 중

6일 오전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의 한 언덕에서 춘천소방서 강촌119안전센터 소속 김석중 소방장이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불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나광현 기자

6일 오전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의 한 언덕에서 춘천소방서 강촌119안전센터 소속 김석중 소방장이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불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나광현 기자

당국의 노력에도 강릉·동해 산불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 강원도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 기준 강릉·동해 산불 진화율은 50% 수준이다. 묵호진동에서도 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산불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춘천시에서 진화 현장에 긴급 투입된 김석중 강촌119안전센터 소방장은 "야간엔 다른 산불 현장으로 이동, 방어선을 구축하고 민가로 불이 옮겨붙는 것을 차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 소방장은 발길을 옮기면서 "비가 좀 와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당국은 이날 동해 시내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 헬기 28대, 진화차 등 장비 255대, 인력 3,597명을 투입했다. 이번 화재로 사라진 산림은 이날 오후까지 1,850㏊로 늘었다. 동해시에선 264명이 보금자리를 잃은 채 망상컨벤션센터와 북평여고 체육관 등지에 피난해 있다.

동해= 나광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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