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공정의 가치를 기필코 다시 세우겠다.”
지난해 6월 29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은 대선 출마의 변이다. 27년 동안 몸담은 검찰 조직을 떠난 지 3개월 만이었다. 다시 8개월이 지난 2022년 3월 9일, 그는 그 말을 지켜야 하는 자리에 올랐다. 정치 입문 1년도 안 돼 권력의 정점에 선, 한국정치사 초유의 사건이다.
윤 당선인은 1960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교수 부모를 둔 학자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연스레 ‘넉넉함’과 ‘여유’는 인간 윤석열을 아우르는 기질이 됐다. 그렇다고 삶의 질곡이 없었던 건 아니다. 62년 인생은 영광과 좌절의 순간마다 급격히 경로를 틀었고, 종착역은 대선 승리였다.
#1. 사법시험, 인내를 배우다
윤 당선인은 생의 절반 가까이를 검사로 살았다. 유복한 청년 윤석열에게 검사로서의 첫 관문, 사법시험은 인내의 가치를 알려준 스승이었다. 고시 문턱을 넘은 건 1991년. 무려 아홉 차례의 도전 끝에 서른을 넘은 늦깎이 나이(31세)에 검사가 됐다. 8번의 낙방을 곱씹으며 체득한, 버티는 힘은 이후 검사 윤석열의 시간을 지배했다. 어떤 외압이 들어와도,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져도 소신과 뚝심을 앞세워 수사를 밀고 나갔다.
누구는 이를 ‘집착’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은 홍준표 의원은 “윤석열 후보는 사시를 9번 도전할 정도로 권력 집착이 강하다”고 평했다. 좋게 해석하면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목표가 섰으면 포기를 모른다는 의미다. 윤 당선인 자신도 “사시 9수를 해서 참는 거 하나는 자신 있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인내는 대통령 윤석열을 만든 밑바닥 자양분이었다.
#2. 잘나가던 특수통 검사의 추락
사실 27년 검사 경력 전체를 놓고 보면 그늘보다 빛이 훨씬 많다. 출발은 늦었지만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대검 중수2과장, 대검 중수1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사이 그에게는 권력형 비리를 뿌리까지 파헤치는 ‘대표 특수통’ 검사란 별칭이 붙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 등 여러 거물 인사들이 윤 당선인의 손을 거쳐 법의 심판을 받았다.
거침없는 질주는 2013년 멈췄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을 맡아 박근혜 정부의 심장부를 향해 칼을 겨눴다. 주변에서 걱정이 쏟아졌다. 그때마다 윤 당선인은 “정의로운 검찰 조직이 내 뒤에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조직을 철썩같이 믿었건만 돌아온 건 좌천이었다. ‘항명 파동’의 중심에 섰고 이후 대구, 대전 등 수사권 없는 지방 고등검찰청을 전전하는, 유랑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해 10월 국정감사장에서 한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지금이야 명언 대접을 받지만, 추락을 재촉하는 지름길이 됐다.
#3. 문재인과의 만남, 다시 비상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명을 다해 가던 검사 윤석열을 살려냈다. 취임 후 그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2016년 12월 국정농단 특검팀 합류가 시작이었다. 수사 능력을 발휘해 박 전 대통령 구속에 관여했고, ‘국민 검사’라는 대중적 인기도 얻었다. 중앙지검장이 돼서도 실력은 여전했다. 다스(DAS) 의혹, 사법농단 의혹 사건 등을 지휘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각각 구속기소했다.
2019년 7월, 마침내 검찰의 최종 보스가 됐다. 전임 문무일 총장(18기)보다 5기수 아래였고 최종 후보군 4명 중에서도 연수원 기수가 가장 낮은, 파격이었다. 서초동에선 ‘격세지감’이란 말이 돌았지만, 여론은 그를 적폐수사와 검찰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라며 박수를 보냈다.
검찰총장 윤석열은 달랐다. 으레 ‘법질서 확립’을 되뇌던 여느 검찰총장의 취임사 틀을 벗어나 “시장의 룰이 깨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룰을 위반하는 반칙 행위는 묵과할 수 없다”며 이례적으로 ‘공정 경쟁’을 강조했다. 대기업을 겨냥한 고강도 수사를 예고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윤 당선인이 강조하고 싶었던 건 ‘자유’와 ‘공정’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당시 “시카고학파인 밀턴 프리드먼과 오스트리아학파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자유시장경제와 형사 법 집행의 문제에 관해 고민해왔다”며 자신의 철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4. 끝없는 투쟁의 길로
확고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배태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에도 똑같은 자세가 돼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격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살아있는 권력’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불공정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월성원전 1호기 조기 폐쇄 과정에서 불거진, 공정하지 못한 절차 역시 윤 당선인은 묵과하지 않고 구속수사 방침을 고집했다.
2020년 1월 정권이 저격수로 낙점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 당선인을 서서히 옭아맸다. 두 사람이 충돌하지 않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검찰총장의 손발을 잘라내는 인사는 시작에 불과했다. 검언 유착 의혹 사건, 한명숙 전 총리 위증 교사 의혹 사건, 라임자산운용 로비 의혹 사건 등에서 수사지휘권을 잇따라 발동했다. 급기야 헌정 사상 최초로 검찰총장을 검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초강수까지 뒀다.
윤 당선인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신임검사 신고식에서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ㆍ전체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했고, 10월 국정감사에선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공정과 정의만 부르짖었건만, 어느덧 그는 반(反)정부 투사로 변신해 있었다. 여권 대항마를 찾던 보수 세력은 그런 검찰총장에게 열광했다.
#5. 승부사 윤석열, 대권 거머쥐다
다시 지난해 6월 29일. 윤 당선인은 출마 선언문에서 “반드시 정권교체”라는 단어를 8번이나 입에 올렸다. 3월 스스로 검찰총장직을 내던지고 3개월 장고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권심판 여망을 등에 업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기록한 20% 안팎의 지지율이 대권 도전 자산의 전부였다. 말 그대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초보 정치인’ 윤석열은 8개월 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전두환 정권 옹호 발언과 같은 숱한 실언,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 논란, 이준석 당대표와의 갈등, 배우자 김건희씨의 허위 학위 논란, 무속 의존 의혹 등 악재가 겹겹이 쌓였다.
그때마다 승부사 면모를 드러내며 위기를 정면 돌파했다. 압권은 3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심야 담판을 통해 야권 단일화를 기어코 성사시킨 일이었다. 결국 민심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정치교체’ 공약보다 윤 당선인의 정권교체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검찰 최종 보스는 이제 대한민국 최종 보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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