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포기'(현대문학 1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우정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철없던 시절에 만나 좋은 친구가 되었던 우리가 훗날 가벼운 안부도 묻기 어려운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각자의 상황이 달라져서, 오해가 생겨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시간이 없어서, 우정은 별것 아닌 이유로도 손쉽게 포기됐다.
현대문학 1월호에 실린 김지연의 단편소설 ‘포기’에 등장하는 세 인물 민재와 미선, 호두를 보며 이제는 안부조차 물을 수 없게 된 나의 오랜 친구들을 떠올렸다.
미선에게 전화를 걸어온 민재는 자신이 고동에 있다고 했다. 서울 토박이인 민재가 지명도 모호한 산골 마을 고동으로 잠적한 이유는 민재가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민재는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 다음 사라졌고 이따금 미선에게만 연락했다. 민재와 미선은 헤어진 이후였지만 서로에게 빚진 것이 없었고 나쁘게 헤어지지도 않아서 가능했다. 미선과 달리 호두는 민재에게 2,000만 원을 빌려줬고, 민재는 호두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물론 경찰에 신고한다면 민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민재가 통장과 카드를 그대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민재를 신고하지 않았다. 빌려준 돈의 액수가 크지 않기도 했지만, 모두 한 번씩은 민재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두 역시 민재의 소개로 지금의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런 신세들로 인해 민재는 완전히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민재가 돌아왔는지 미선에게 물어보는 것도 돈을 돌려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우정과 사랑에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섞여 있어서, 그것이 종료된 뒤에도 한 가지 감정만으로 추억할 수가 없었다. 미선에게도, 돈을 빌려준 친구들에게도, 민재는 밉기도 한데 그립기도 한 존재다. 민재는 매달 조금씩 호두의 돈을 갚아 나간다. “돈이 제일인 세상에서 그거만큼 확실한 안부 인사”도 없었기에, 호두는 민재가 돈을 다 갚고 나면 민재의 안부를 확인할 수 없을까 걱정한다.
“이불을 개면서 더는 만나지 않는 친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잠깐씩 궁금해한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정은 조금 나아졌는지, 모두에게 상처를 주며 잠적해야만 했던 일에서는 벗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아픈 덴 없는지, 아무리 고심해봐도 나로서는 그런 질문들에 답을 내릴 수 없고 그 답을 알 수 있을 사람들 몇몇이 그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가도 이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저어버린다.”
대학교 졸업식날 함께 졸업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대목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 가사가 어쩐지 우리 앞날에 대한 예감 같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세상은 정말 미친 것 같고, 나는 안부를 물을 수 없게 된 친구들을 떠올리며 다만 이 노래를 혼자 흥얼거릴 뿐이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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