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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포장마차에서 금풍생이를 먹으며 하멜을 생각했다

입력
2022.03.26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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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수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하멜방파제와 하멜등대의 모습. 여수 관광 문화 제공

하멜방파제와 하멜등대의 모습. 여수 관광 문화 제공


네덜란드 사람 하멜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효종 치세 6년, 서양 달력으로 1655년 3월의 어느 날, 한양으로 향하던 청나라 사신 앞에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남자 둘이 뛰어들었다. 언뜻 선조 때 조선에 표착한 남만인(스페인 사람) 후안 멘데스와 비슷해 보였으나, 이들은 사실 아란타(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항해사 헨드리크 얀스(Hendrik Jansz)와 포수 헨드리크 얀스 보스(Hendrik Jansz Bos)였다. 둘은 청나라 사신이 탄 말의 머리를 붙잡으며 외쳤다. “야뽄! 야뽄! 낭가삭기, 낭가삭기!” 조선 의복을 입고 있던 두 남자는 손짓발짓을 해가며 열정적으로 뭔가를 알리려 했으나, 뜻이 가 닿지 않자 옷깃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저고리 속으로 낯선 서양식 의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을 호위하던 조선 군인들이 달려와 포수 헨드리크 얀스 보스를 포박했다. 항해사 헨드리크 얀스는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는 걸 보더니,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얼마 못 가 잡혔다.

만약 하멜의 이야기를 내가 영화로 만든다면, 이 장면을 도입부로 삼고 싶다. 1630년에 출생한 네덜란드 사람 헨드릭 하멜의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일지’는 국내에선 ‘하멜 표류기’로 알려져 있다. ‘하멜 표류기’라니까 조류에 떠밀려 우연히 조선 땅에 닿은 네덜란드 사람이 우리 선조들에게 환대받으며 흥청망청 살다가 “잘 놀다 갑니다”라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쓴 일기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내용은 참혹하다. 타이완에서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 중이던 스페르베스호가 구로시오해류에 떠밀려 제주 바다에 닿은 것은 1653년. 타이완에서 떠날 때 승선자는 총 64명이었으나 제주 땅에 살아 도착한 사람은 고작 36명이었다. 배에는 목향, 명반, 용뇌, 대만산 녹피 등 당시 조선에선 구하기도 힘들었던 30만 냥 값어치의 외산품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하멜의 일행은 배를 타고, 말을 타고, 걷기도 하며 장장 보름여를 이동해 ‘시오르’(서울)로 끌려갔다. 효종 앞에 불려간 이들은 네덜란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온갖 아양을 떨고 난 후 일본으로 보내 달라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효종은 희한하게 생긴 이 오랑캐들을 훈련도감으로 보냈다. 훈련도감은 조선의 수도를 지키는 군대. 지금으로 따지면 천재지변으로 한국 땅에 발이 묶인 난민을 남태령 수도방위 사령부로 보낸 셈이다. 화승총을 잘 다룬다는 이유로 타국 왕의 호위무사가 되기 위한 군사 훈련을 받으며, 틈틈이 백인의 생김새를 신기해하는 고관대작들의 집을 찾아 재롱잔치를 벌이기도 했으니, 지금은 없어진 대한민국 연예병사 역할까지 한 셈이다. 청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면, 효종은 하멜들을 저 멀리 남한산성으로 보내거나 집에 가둬 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 아마도 청나라 사신의 눈에 띄었다가는 스페르베르호에 실린 30만 냥어치의 외산품에 대해 물어볼지 몰라 껄끄러웠을 것이다.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하멜전시관과 하멜 동상의 모습. 여수시 제공

전라남도 여수에 있는 하멜전시관과 하멜 동상의 모습. 여수시 제공


앞서 언급한 영화의 도입부는 하멜의 일행인 헨드리크 얀스와 헨드리크 얀스 보스가 조선 왕의 이 명령을 어기고 청나라 사신의 앞에 뛰어들어 “우리를 일본으로, 나가사키로 보내 주십쇼”라고 청원하는 장면이다.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서 연예 병사 생활이나 하며 익숙하지도 않은 쌀밥을 빌어먹는 일이 얼마나 서러웠으면 청나라 사신의 말머리를 잡고 늘어졌을까? 결국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투옥되어 사망했으며, 남은 하멜 일행은 전라도로 유배됐다.

여수는 하멜이 13년에 달하는 조선살이 중 탈출하기 전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다. 여수에서 하멜은 좌수사의 명에 따라 뙤약볕 아래서, 간혹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야외 대기를 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벼를 빻거나, 문을 지키거나, 조선 군졸들이 연습 차 쏜 화살을 주우며 시간을 보냈다. 1666년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줄곧 그랬다. 그러니 하멜이 먼 훗날 조선의 후신인 대한민국 여수시 사람들이 종화동 방파제 앞길을 ‘하멜로’라 부르고, 방파제에 있는 등대에 하멜의 이름을 붙이고, 그 앞에 ‘하멜전시관’까지 지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분노하거나 서러워하거나 분노하며 서러워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10년 전 하멜로 끝에 있는 하멜방파제 앞 하멜포차에서 갑오징어 먹밥을 먹으며 하멜의 서러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포차 사장님이 방파제로 이어지는 넓은 길 한가운데에 깔아 둔 호젓한 테이블에서, 잎새주에 카스를 타서 마시며 돌산과 자산을 오가는 케이블카의 조명과 하멜등대의 불빛을 누렸다. 계절은 뜨거운 여름이었고, 밤거리는 한산했다. 하멜로의 끝에선 젊은이들이 그나마 있는 행인들을 그러모아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하멜거리의 주인공은 이미 하멜이 아니었다. 버스커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오디션 출신 그룹이 부른, 그해 봄에 히트 친 노래였다. 그때는 ‘아, 저 노래 때문에 여수에 밤바다 보러 오는 사람 좀 있겠다’ 싶었다.

이순신광장에서 하멜전시관에 이르는 1.5km 해양공원에는 낭만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순신광장에서 하멜전시관에 이르는 1.5km 해양공원에는 낭만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 호젓하게 광장에 테이블을 깔아 두고 술을 마실 수 있는 풍경은 사라졌다. 여수엑스포와 ‘여수밤바다’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벚꽃이 필 정도로 날이 따듯해지면, 하멜등대 앞 낭만포차거리는 낭만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거대한 포장마차 촌이 서고, 가게와 가게 사이 빈틈마다 대기 의자를 놓아 둘 정도로 붐빈다. 사람이 많아지니 도시가 변했다. 하멜포차는 내 기억이 맞다면 작은 단독주택을 개조한 듯한 낮은 단층 건물에 있었다. 10년 만인 지난 3월 중순 여수를 찾아 하멜포차가 있던 자리에 다시 가보니, 주변의 여러 필지를 묶어 올린 버젓한 5층 빌딩이 서 있었다. 다행히 1층엔 같은 이름의 가게가 영업 중이었다.

도시가 변하니 도시와 그 이름이 풍기는 정조도 변했다. 1990년대에 발표한 한강의 중편 소설 ‘여수의 사랑’은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 대고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소설에서 여수는 서울의 자취방에서 동거하는 두 여자의 아픔이 잉태된 도시다. 여수, 그곳은 소설 속에서 아름다고, 처연하고, 외롭고, 가엽고, 쓸쓸하고, 가냘프고, 날카롭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드러나는 여수의 심상에서 지금의 여수를 상상하기란 무척 힘들다. 화자 정선은 통일호를 타고 전라선의 종착역인 여수에 가 닿는다. 통일호는 이제 사라졌고, 여수역은 철거됐다. 태풍이 몰아치는 날 여수EXPO역에 내리더라도 철선이 울부짖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그 역에서 내리면, 거대한 은색 파빌리온들로 가득 찬 미래적 풍경 속에 한화 아쿠아리움 간판이 보인다. 여수EXPO역에서 여니교를 건너 지금은 텅 비어 있는 엑스포 주제관을 향해 걷자면, 두 여자의 아픔이 잉태된 도시가 이젠 여수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든다.

돌산과 자산을 오가는 해상 케이블카와 나란한 거북선대교 아래로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돌산과 자산을 오가는 해상 케이블카와 나란한 거북선대교 아래로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도시는 생물처럼 자랐다. “서쪽으로 가면서 자랐어요. 여기, 여수는 동쪽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가면서 자랐어요.” 건민어탕 국물이 끝내주는 봉산동 부영식당 사장님이 말했다. 도시설계와 도시계획 분야에 정통한 학자 한광야 교수의 책 ‘도시에 서다’를 보면 여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자란 데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근대 도시 발전을 보면 공통적인 양상이 발견된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시장이 형성되고, 시장 인근에 항구가 들어서고, 항구 주변에 원도심이 형성된다. 연등천이 흘러 여수만과 만나는 곳에 중앙시장과 교동시장이 있고, 지금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곳에 여수구항이 자리를 잡았다. 항구로 드나드는 물류가 많아지면 철도가 들어서고, 철도가 들어선 곳에 새로운 도심이 형성된다.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공화동에 여수역이 들어섰고, 여수구항에서 여수역을 포함하는 지역 일대가 여수의 구도심을 이뤘다. 여천과 여수가 여수시로 통합되고, 아파트 단지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도시는 여서동과 여수시청 본청이 있는 학동으로 마치 이끼처럼 번졌다.

10년 전 여수를 찾았을 때는 웅천해변마을에 인공 해수욕장이 만들어진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웅천해수욕장(웅천친수공원)에서 장도로 건너가는 ‘장도교’는, 사실상 ‘교’자를 붙이기 민망할 만큼 정감 가는 다리였다. 폭이 한 4m나 될까 싶은 그 다리엔 가드레일도 없었다. 만조 때면 다리는 물에 잠겼다. 간조 때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장도에 사는 할머님들이 다리를 건너와 뻘에서 바지락을 잡았다. 웅천은 10년 사이 거대한 신도시가 됐다. 이순신공원을 아파트 단지들이 호위무사처럼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미래적 도시 웅천은 여수의 강남으로 불린다. 최고동이 42층인 4개동짜리 생활숙박시설 웅천 자이 더 스위트는 마치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듯 오만한 아우라를 풍긴다.

웅천해변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웅천해변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도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여행자의 시선은 오히려 시원(始原)으로 향한다. 봉산동의 포장마차에서 금풍생이를 먹으며 이순신 장군이 평선이라는 군 관기의 집에서 처음 그 생선을 먹어 군평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엉터리 말들을 늘어놓는다. 연등천 서편 대도멘션 앞 포장마차에서 노랑가오리회를 시켜 먹고, 요새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는 한꾼에88포차에서 2차로 돼지갈비를 먹어볼 수 있을지 대기 번호를 기웃거려 본다. 현지 사람들이 신도시의 보금자리를 찾아 잠들 시간, 여행자는 포장마차에서 나와 불 켜진 상점 하나 없는 원도심의 적막함을 즐긴다. 여행자는 오만하다. 자신이 사는 도시는 발전하기를 원하면서 남의 마을은 옛 모습을 더 오래 간직하길 바란다. 웅천 자이 더 스위트도 좋지만, 갯것 잡던 할머님들을 보는 일도 참 좋았다는, 그런 생각을 한다.

박세회 (소설가·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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