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는 '옷과 음식과 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 요건'이다. 몸을 보호할 옷, 오늘을 살게 하는 먹거리와 지붕은 생명 연장의 수단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대우로 해석된다. 그중에서도 우선시할 하나는 무엇일까? 그 답은 사람 또는 사회마다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말의 구성이다. 우선 한국말을 비롯하여 일본말, 중국말 등지의 언어를 살피면 옷, 음식, 집이 차례대로 나온다.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집단주의 의식 때문일까? 이에 비해 유럽과 아메리카의 여러 말에서는 '먹는 것, 옷, 거주할 곳'의 순인 점이 흥미롭다.
가히 지구촌이라 할 현재, 옷은 어느 정도 보편화한 듯하다. 서양에서 들어온 옷이라는 '양복'은 구한말에는 개화복으로도 불렸다. 개화파들의 기록에 따르면 양복을 입고서 문밖을 나섰다가 구경꾼이 너무 많이 몰려 100m를 나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당시 '양복'에는 차별적 꼬리표가 붙어 있었지만, 서양 옷을 일상에서 입게 된 이후에는 그저 옷이라 한다. 삶의 기본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써 편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은 집도 마찬가지이다. 집은 사는 곳의 날씨와 자연환경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것이나 만약 무난한 환경에 집을 짓는다면 문화적으로 달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셋 중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무엇인가? 먹거리이다. 외국에서 살면서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은 무엇인가? 이 또한 먹거리이다. 먹거리는 한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식주의'가 아닌 '의식주'인 까닭이 새삼 궁금해진다.
이제 의식주는 '의식주통'이 되었다. 의식주통이란 우리 삶에 교통과 통신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생겨난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자유롭게 정보를 취하며, 그 정보로 자유롭게 이동한다. 기차나 비행기 등의 물리적인 공간에서 하는 이동만이 아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시간을 넘고 국경과 상관없이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국가의 통제로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한 나라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닫혀버렸다며 통곡을 했다. 물론 '통' 외에도 삶에 중요한 무언가는 더 있다. 다만 의식주통을 통해 지금껏 알아온 인간 삶의 기본 요건이 고정관념이라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지 않았나 돌아본다. '의식주통'이 나의 네 벽에 창문을 뚫어주고 간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