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흥미진진하기를. 과한 욕심처럼 보이지만 많은 집 짓기는 이런 욕망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정착하고 싶으면서도 훌훌 떠나고픈 이중적인 감정 사이에서 끝없이 분투하며 사는 존재 아닐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안락함은 주되, 결코 권태롭지 않은 집이 있다면.
경기 용인 기흥구의 단독주택 '진진가(대지면적 235.00㎡, 연면적 226.97㎡)'는 이 어려운 숙제를 잘 풀어낸 집이다. 비결은 빛과 곡선이다. 빛이 집의 곡선 면에 부딪히며 만드는 그림자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1층 거실 벽면에는 가끔 무지개도 뜬다. 이 집의 건축주이자 건축가인 김연희 아키텍츠진진 건축사사무소 소장은 "평생 한 집에서 사는 게 너무 지겨우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설계하면서 예측하지 못한 다채로운 빛의 형태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더라"고 했다. 이름처럼 "진진(津津)한 집"이다.
경사진 땅 모양 살려서... 한옥처럼 아늑한 마당
진진가는 블록형 택지지구에 위치한 3층 집이다. 1층은 주방과 거실, 2층은 침실, 3층은 옥탑과 다락이 자리한다. 지난해 1월 준공된 집에 김 소장과 남편(43), 초등학생 아들(9), 고양이 두 마리가 산다. 건물은 밖에서 봤을 때 오목하게 들어간 모서리를 중심으로 한 번 꺾인 '기역(ㄱ)'자로 배치됐다. 남편의 요구였던 마당(15평)을 충분히 확보하면서도 외부 시선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집은 외부와 내부 모두 비스듬한 대지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지었다. 가장 높은 곳(대문)과 낮은 곳(마당)의 높이 차이가 1m 정도다. 김 소장은 "한옥 마당의 공간적 구성을 차용해 땅의 형상을 이용한 자연스러운 단차를 만들었다"며 "한옥처럼 마당이 실보다 내려와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고 설명했다. 마당과 집 안의 단차는 한옥의 툇마루와 같은, 비를 맞지 않는 외부 공간을 통해 연결된다. 도로와 접한 외벽(흰색 스토로 마감)과 달리, 마당과 면한 외벽은 따뜻한 물성인 목재(이페나무)로 마감해 한옥의 아늑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실내도 단차를 그대로 반영했다. 높은 곳에는 거실을, 낮은 곳에는 주방을 두어 별도의 벽이나 문 없이도 공간의 높낮이로 영역이 구분된다. 거실에서 두 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주방이고, 주방은 다시 마당과 연결된다. 김 소장은 "단차는 공간을 구획하는 기능도 있지만, 단차로 인해 생기는 계단, 툇마루, 댓돌 등이 더 풍부한 공간감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천창, 보이드 공간... 은은한 빛이 흐르는 집
단독주택은 사방으로 창을 뚫을 수 있다. 공동주택처럼 거주자가 늘 특정 방향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2층 안방에 크게 난 북쪽 고측창이 이를 잘 보여준다. 건축가는 천장 높이에 창을 계획해 방과 접한 도로로부터 사생활은 보호하면서도 적절한 채광을 확보했다. 그는 "아파트는 모두 같은 방향, 보통 남쪽에 엄청 큰 창을 두고 요즘에는 그것마저 실내화해 외벽에 바로 창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며 "단독주택은 창을 공간의 특성에 맞춰 자유롭게 계획할 수 있고, 그게 다른 삶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갖가지 창으로 들어온 빛은 흰 벽을 도화지 삼아 집 안 구석구석에 그림을 그린다. 60㎝ 폭, 4.5m 길이의 반원 모양 천창으로 쏟아진 빛은 9m 높이의 1~3층 계단실을 비추며 벽면에 갖가지 그림자를 만든다. 천창의 빛은 자칫 어두워지기 쉬운 계단실을 밝히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단순한 행위에도 생기를 준다. 2층 남쪽에 난 큰 창으로 유입된 빛은 2층 바닥(1층 천장)에 뻥 뚫린 보이드(void) 공간을 통해 1층으로 떨어진다. 이 과정에서 보이드 공간을 둘러싼 투명 난간에 부딪혀 굴절된 빛이 거실 벽면에 무지개를 만들기도 한다.
실내를 유유히 흐르는 빛은 쨍한 직사광선이 아닌 은은한 간접광이다. 남쪽 마당을 향해 크게 난 1층 창에도 처마에 한 차례 부딪힌 빛이 유입된다. 손님들이 이 집을 '미술관 같다'고 하는 이유도 흰색 도장으로 마감한 벽과 간접광의 영향이 크다.
집은 안팎의 많은 곳이 곡선으로 이어져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게 건물 외관이다. 많이 쓰는 볼록 곡선 대신 움푹 들어간 오목 곡선으로 이 집만의 개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외부 오목 곡선 자리와 맞닿아 있는 내부에는 계단실을 두었다. 외관의 곡선 디자인은 실내에도 영향을 줬다. 계단 난간, 천창, 보이드 공간 등 곳곳을 이와 어울리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디자인했다. 특히 3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실은 층마다 서로 다른 곡률로 구성해 수직적인 공간의 입체감을 더했다.
디자인적 측면만 고려해 곡선을 쓴 건 아니다. 건축가는 "사람의 동선과 유사한 건 직선이 아니라 유선형, 곡선이라고 생각해서 공간에 반영했다"며 "빛이 수직면에 닿았을 때보다 곡선 벽에 닿았을 때 더 다채로워지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옥상에선 하늘 보고, 마당에선 캠핑
가족은 결혼하고 10년간 수원, 용인 등지의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았다. 부부가 "삶의 가치를 여행 같은 다른 데 뒀기 때문"이었다. 집에 그렇게 큰돈을 묶어두기 싫었다. 하지만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가 되자 원하는 형태의 공간이라면, 평생 살 집이라면 과감한 투자도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 그렇게 건축비 5억7,000만 원(2020년 기준)을 들여, 진진가는 아내이자 엄마가 직접 지은 세 식구의 첫 단독주택이 됐다.
건축주가 돼보는 경험은 건축가가 설계 시 "집의 실용성을 더 신경쓰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보일러 소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위치, 수도 배관이 동파되지 않게 하는 방법, 온수 분배기의 가장 합리적인 위치 같은 디테일이 건축 디자인의 완성도와 버금가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가족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널찍한 마당이다. 봄에는 꽃을 보고, 여름에는 간이 수영장으로 쓴다. 가을과 겨울에는 불멍, 캠핑을 하며 지낸다. 이번 겨울에는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장박'을 했다. 외벽을 높게 만든 옥상에서는 해먹에 누워 하늘을 본다. 집 덕분에 아파트에서 살 때보다 일상이 훨씬 풍요로워졌다. "저희 가족은 이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의 생활이 물 흐르듯이 편안하거든요. 마당에 머무를 때는 안정감을 느끼고요. 사는 사람이 편안한 집, 그게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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