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우리 집은 돈이 없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로부터 이 말을 들어 왔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몇 년 뒤 겪게 된 1997년 외환위기로 아빠는 일자리를 잃었고, 한참 방황하다 자영업으로 눈을 돌렸어요. 치킨집을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제가 아홉 살 무렵 화재가 나면서 형편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식당을 개조해 안쪽은 가정집, 바깥은 가게로 운영하고 있던 터라 저희는 한순간 집과 일터를 모두 잃었습니다.
이웃집에 얹혀 살다 겨우 작은 원룸을 구했는데, 이때 엄마의 말이 아직도 기억나요. "우리 집은 지금 이런 것도 먹으면 안 되고 라면 하나만 먹어야 하는데…" 당시 이 말을 들은 저는 '그러면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은 좀 더 풍족하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중학생 때는 집에 정말 돈이 없는 줄 알고 학교 지원을 받으려고 교무실에 찾아간 적이 있을 정도예요. 하지만 선생님은 "지원받을 정도로 가난하지 않다"며 저를 돌려보냈어요. 고등학생 때도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고 아빠에게 겨우 인터넷 강의를 끊어 달라고 했습니다.
유년 시절 부모님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와 언니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해주고 싶어 하셨어요. 다만 불이 난 뒤로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끼니를 대충 때우던 저는 중학생 때 크게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 저를 잘 챙겨 주지 못했다며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요.
돈이 없다는 하소연은 저희 집 형편이 나아진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최근 언니가 결혼하고 싶다며 남자친구를 가족에게 소개했어요. 그런데 이 자리에서 엄마가 또다시 돈 얘기를 꺼내는 겁니다. 엄마는 언니가 결혼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리고 우리 집 돈이 없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 정도로 겨우 풀칠해. 너희 집에서 우리 집에 뭘 해줄 수 있니"라고 했어요. 이 일로 엄마와 언니는 크게 다퉜습니다. "왜 남자친구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냐, 부끄럽다"며 따지는 언니에게 엄마는 "사실인데 뭘 그러냐"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이제 아빠의 장사도 나름 자리를 잡았고, 집도 자가로 장만했습니다. 언니는 교사로 일하며 안정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고요.
그래도 엄마는 저희가 무언가를 선물해줄 때도, 아빠가 외식하자며 나가자고 할 때도 어김없이 "그 돈이면 ~를 할 텐데"라고 말합니다. 저희가 지적하면 엄마는 "미안하다, 버릇인 것 같다"고 넘어가고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해요. 엄마는 대체 왜 이럴까요. 집밖에서만큼은 돈 없다는 소리를 못 하게 말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요.
채민지(가명·28·취업준비생)
민지씨, 돈은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상이지요. 또한 돈은 법처럼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지갑에서 꺼낸 돈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지만, 그것은 경제 활동을 위해 사회가 약속한 숫자로 추상적 가치를 표현한 증서일 뿐이지요. 돈은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대상이면서 누군가에게는 정서적인 의미가 담긴 대상이기도 해요. 돈이 곧 안정감을 의미하는 사람이라면 돈이 조금씩 줄어들 때 상당히 불안해하겠죠. 그렇다면 민지씨 어머니에게 돈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부터 이해해봐야 개선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지씨 어머니는 돈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억울한 감정이 들 것 같아요. 민지씨 가정은 외환위기 때 경제적으로 직격탄을 맞았어요. 지금 코로나19로 어려워진 자영업자와 비슷한 감정일 거예요.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손쓸 수 없는 일로 궁지에 몰렸고, 다시 일어서려고 치킨집을 열었더니 이번엔 불이 나서 전 재산을 날리고 거리에 나앉게 되었어요.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겠습니까. 차라리 열심히 살 지 않아서 그랬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는 이 상황을 굉장히 모욕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어린 자식들 데리고 이웃집에 가서 몸 누일 곳을 부탁해야 했고,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네 식구가 살 방을 구해야 했어요. 아마 그 과정에서 믿었던 사람의 도움을 못 받는 일도 있었을 것이고, 상대의 냉랭함 같은 것들도 경험했을 거예요.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겠지요. 어머니에게는 이 곤궁했던 시절의 기억이 고통스럽게 각인돼 있을 겁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 볼 때 '돈 없다'는 어머니의 발언은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먼저, 상대방에게 경제적 문제와 관련해 선을 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어렵게 일군 이 경제적 안정감을 깨뜨리지 않겠다, 이 안정감을 움켜쥐고 지키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어머니는 돈을 곧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명예, 자존심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빌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없다고 하면 되지, 왜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낼까 의문이 들거든요. 그것도 "우리 집 넉넉하지 않아" 정도도 아니고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의 말에는 아마도 자신이 이렇게 말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살피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돈이 없을 때 주변에서 받았던 서러움, 멸시로 인한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에 상대의 반응으로 그 사람이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지를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보호하려는 본능적 행동일 거예요.
또 한편으로는 예비 사돈 댁에서 민정씨 집에 아예 돈과 관련된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수 있어요. 자식들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낼 때는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해이해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한 건 민지씨 어머니는 돈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상당히 비장한 자세로 임한다는 겁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가치가 돈과 연관돼 있어요.
당신은 이런 어머니와 함께 살며 괴롭고 짜증날 때가 많았을 거예요. 한 집에 사는데다 일상에서 돈 얘기가 나올 상황은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너무 많지요. 그렇다면 당신한테 돈은 어떤 의미일까요. 민지씨는 지금까지 천칭 저울 한쪽에는 '나'라는 사람을, 다른 한쪽에는 '돈'을 올려 놓고 살아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민지씨는 항상 돈을 강조하는 어머니의 발언이나 행동을 통해 엄마에게 나보다 돈이 더 무거운(소중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녔던 것 같아요. 돈을 나라는 존재와 비교하는 대상, 저울질해야 하는 대상처럼 느꼈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신은 어머니에게 정말 필요한 돈도 달라는 말을 못했을 거예요. 엄마가 혹시나 자기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워서요. 이건 자식들이 미안해서 부모한테 돈 달라는 말을 못 꺼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나서는데, 자식들이 도저히 미안해서 돈 달라는 말을 못했다면 그 행동은 고생하는 어머니를 향한 미안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 맞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내가 없으면 우리 집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 즉 '내가 돈 달라고 안 하면 엄마한테 그 소중한 돈이 더 많이 돌아가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갖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게 큽니다. 어머니한테 돈이 인생의 고통이자 억울함이었다면, 당신에게 돈은 어머니의 사랑을 놓고 경쟁해야 할 대상이자 미안함을 넘어선 죄책감이었던 겁니다.
물론 부모가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모든 일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럴 때 부모는 아이한테 그냥 솔직하게 잘 말해 주면 돼요. 지금 우리 경제 사정에 이 학원은 버거워서 못 보내주지만, 이런 결정이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너를 덜 사랑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의사를 곡해하지 않게 전달해 주면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당신 사이에서는 이런 과정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끊임없이 자기라는 존재의 가치와 돈을 저울질하며 무게를 재 왔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지금 와서 어머니를 바꿀 수는 없을 거예요.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인 돈에 대한 개념과 감정이 어찌 몇 마디 말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머니가 돈 이야기를 하는 횟수를 좀 줄이는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를 위해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했다는 걸 '선언'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언니의 경우 경제적 독립을 했더라도 이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민지씨도 지금 취업을 준비하며 혹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면 그 기간과 한도를 정해서 어머니께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 당신 인생에서 자식들이 더 이상 돈과 관련해 고민이나 걱정, 부담을 드리지 않겠다는 의도를 전달하는 거지요.
민지씨도 이번 기회에 본인이 가진 돈에 대한 개념을 한 번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을 돈보다 더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여요. 돈은 정당하게 벌어서 다른 사람과 나 자신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의미있게 쓰는 게 중요하지요. 그러나 돈이 나의 존엄성을 대변하는 지표가 되거나 자존심이 되면 돈에 얽매이고 집착하게 됩니다.
민지씨도, 민지씨 어머니도 그동안 돈이라는 주제를 무겁게만 여겼다면 이제는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민지씨에게 돈은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되는 대상이자 죄책감을 유발시키는 고통이었다고 어머니와 진솔하게 이야기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또한 돈에 얽혀 있는 어머니의 고통을 공감해 드리고 감사함을 표현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어머니의 명예와 자존심을 세워 드리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가족이 돈과 관련된 대화를 하는 것이 불편하고 쉽지 않겠지만, 속마음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때 마음이 훨씬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oh-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