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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적인 '에로틱 스릴러', 페미니스트는 즐길 수 있나

입력
2022.04.16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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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길티 플레저' 죄책감과 쾌락 사이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길티 플레저'는 죄책감을 동반한 쾌락이다. 어떤 일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심리를 가리킨다. 게티이미지뱅크

'길티 플레저'는 죄책감을 동반한 쾌락이다. 어떤 일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좋아하고 즐기게 되는 심리를 가리킨다. 게티이미지뱅크

'길티 플레저'라는 말이 있다. 죄책감을 뜻하는 'guilty'와 쾌락을 뜻하는 'pleasure'의 합성어인 '길티 플레저'는,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떳떳하지 못한 즐거움'이라는 의미로 통한다. 요컨대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 뻔한 담배나 커피와 같은 기호 식품에 대한 선호, 예술적 가치가 거의 없다고 여겨지는 대중 영화·문학·만화에 대한 취향, 또는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리라 여겨지는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일 역시도 넓은 의미로 '길티 플레저'에 속한다.

만약 어떤 대상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말하기 망설여진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길티 플레저'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다. 죄책감은 내 양심상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꾸짖는 내면의 목소리에 가깝고, 수치심은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외부의 시선에 가깝다. 따라서 전자는 옳고 그름의 개념과, 후자는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들과 관계할 것이다.

이런 구분에 의존했을 때, 소위 '빻은(나쁜)' 취향으로서 '길티 플레저'는 내가 특정 대상에게 느끼는 즐거움이 나의 정치적·도덕적·미적 기준에서는 거의 범죄나 다름이 없다는 자기 선고를 전제로 한다. 엄밀히 따져 '길티 플레저'란 단순히 남들에게 알려졌을 때 '망신스러운' 취향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내게 내면화된 정치적·도덕적·미적인 규율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안 돼'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길티'한 '플레저'들이 늘어난다. 자신의 규율과 쾌락, 양자 모두를 포기할 수 없는 양심적인 '길티 플레저'의 주체에게 이제 죄책감과 즐거움은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결합된다. 결국 어느 시점에서 '순수한' 즐거움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까다로운 페미니스트의 '길티 플레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이 대목에서, 남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빽빽한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들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즉 페미니스트로서의 도덕적 규율을 강하게 내면화하면 할수록 기존의 즐거움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된다. 요컨대 내가 즐겨왔던 모든 것들이 알고 보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대상화하고, 억압하는 관점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공모' 의식이 즐거움을 박탈하는 것이다. 곧 모든 '플레저'는 '길티'해진다. 웃음기가 가신 자리를 심각한 무표정함이 대체한다.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자 운동의 인식론적 틀이란 곧 세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각성'하는 과정을 요구하기에, 심각함은 그 과정에 수반되는 '디폴트(기본)' 표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심각함을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커지면 마땅히 심각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고 다니게 된다. 페미니스트 도덕의 판사를 자처하는 심각한 이들은 기쁨과 즐거움이 가부장제와 공모한다는 명목하에 이들을 심문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제와 공모하고 있으므로 이들은 페미니스트 도덕 앞에서 언제나 유죄 선고를 받는다. 아마도 우리의 즐거움은 적들의 즐거움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내부에서 '길티 플레저'는 고사하고 '플레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길티'한 것이고 '플레저'한 것인지, 그 내용물의 자격을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퀴어 비평의 유용한 유산 중 하나는 우리의 즐거움이 우리의 까다로운 위치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길티'와 '플레저' 양자 모두로부터 탈주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바로 그 왕복 운동 자체에서 오는 쾌락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제공하는 즐거움이 이미 남성중심적이라면 우리가 그들이 정해 준 방식대로 가만히 앉아 즐거워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페미니스트 주체에게 허락된 유일하고 특별한 쾌락일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치열하게 '길티 플레저'를 문제화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검열하는 대신에 말이다.

'에로틱 스릴러'라는 '길티 플레저'

'에로틱 스릴러'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원초적 본능' 포스터(오른쪽)와 스틸컷. 다음영화 캡처

'에로틱 스릴러'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 '원초적 본능' 포스터(오른쪽)와 스틸컷. 다음영화 캡처


내 '길티 플레저' 중 하나는 '에로틱 스릴러'로 분류되는 대중 영화들이다.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에로틱 스릴러'를 즐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를 몇 가지 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 대부분이 여성혐오적인 편견을 사건의 강한 동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 장르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이 대체로 겉과 속이 다르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능력도 있고 외모도 뛰어나지만 내면은 위태롭고 예민하다. 그들은 보통 사랑할 남자를 필요로 한다. 셋째로는 이 여성들이 지극히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창조된 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이들을 창조한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르를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성 작가들의 편견이 덕지덕지 투사된 모순 덩어리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가 대단히 흥미롭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르적 특징은 형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에로틱 스릴러'는 쉽게 말해 남성의 섹스 판타지와 정통 미스터리가 결합한 장르다. 탐정으로서의 남성 주인공은 여성이라는 궁극적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또는 위험을 즐기면서 여성 가까이로 다가간다. 남성 주인공이 여성과 육체적으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줄거리상의 위기가 고조된다는 것이 이 장르의 큰 특징 중 하나다. '에로틱 스릴러'에서 여성의 유혹적인 육체는 남성 탐정이 풀어야만 하는 '위험한 문제' 그 자체로서 제시된다. 바꿔 말해 이 장르에서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여성인 셈이다.

물론 그것은 백래시이지만

영화 '위험한 정사'에서 '알렉스'가 등장하는 장면. 구글·다음영화 캡처

영화 '위험한 정사'에서 '알렉스'가 등장하는 장면. 구글·다음영화 캡처


'에로틱 스릴러'의 대표작으로는 폴 버호벤 감독의 '원초적 본능'(1992)이 있지만, 그 이전에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의 '위험한 정사'(1987)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정사였기에? 80년대와 90년대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에로틱 스릴러'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영화의 제목이 곧 치명적 여성성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공통점도 있다. 바로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밍숭맹숭한' 얼굴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통의 백인 남성'이기에 영화를 보는 다른 남성 관객들이 이입하기 쉬웠을 테다.

'위험한 정사'에도 마이클 더글러스는 유부남인 주인공, '댄'으로 등장한다. 그는 글렌 클로즈가 연기한 능력 있는 싱글 여성, '알렉스'와 몇 차례 격정적인 혼외 정사를 가지게 된다. '가정적인' 남자인 그는 결국 관계를 정리하고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알렉스'는 협박과 애원을 섞어가며 그를 붙잡는다. 설상가상으로 '알렉스'는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이다. 영화가 전개되며 관객들이 알게 되는 것은 '알렉스'가 'BPD(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에 준하는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해와 자살 협박을 통해 남자를 정서적으로 끈질기게 괴롭힌다. '위험한 정사'의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알렉스'의 이러한 자기 파괴가 일가족을 파멸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남자에게 있어 '알렉스'의 바닥 없이 하강하는 부정성의 에너지는 총이나 칼보다 더 위협적인 무기다.

수전 팔루디의 책 '백래시'는 '위험한 정사'가 등장한 배경을 설명하며 당시 미국 대중문화 내에서 '싱글 여성을 정신질환자로 묘사하는 분위기'가 만연했음을 지적한다. "최고의 싱글 여성은 죽은 싱글 여성"이라는, 페미니즘의 부흥과 싱글 여성의 증가에 대한 반응으로서 남성중심적 사회가 보내는 협박조의 메시지는, 결국 '위험한 정사'의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백래시'에 따르면, 당시 '위험한 정사'가 상영되는 영화관 내부에서 남성 관객들은 '알렉스'를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여성 관객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 여자들의 입을 다물게 했을 공포를 안다. 동시에 그 여자들이 '알렉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그녀들이 무슨 생각을 했든, 그것은 '알렉스'의 처단을 바랐던 그 심약한 남자들의 단순한 욕구보다는 더 복잡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그 복잡함은 '길티'와 '플레저' 사이 어딘가에서 출현하는 페미니스트 주체의 까다로운 즐거움과 닮아 있을 것이다.


이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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