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정 경희대 의과대학 교수 논문
살균제 물질 노출하자 실험쥐 폐 면역반응↓
"다시 이런 일 겪지 않으려면 계속 관심 가져야"
"이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알아야 치료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고 피해보상의 길이 열리는데, 지금까지 제대로 된 원인 분석 연구가 없었다는 걸 알고는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11년간 집계된 피해자 수만 7,700명에 이르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원인불명 폐질환' 발생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초를 국내 연구자가 찾았다.
18일 박은정 경희대 의과대학 교수는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살균제 제품에 사용된 'PHMG-P(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인산염)' 물질을 활용한 동물실험 결과 우리 몸의 일반적 면역체계인 항염증 과정이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해당 내용을 담은 논문은 14일 독성학 저널(Toxicology Letters) 온라인판에 공개됐다.
그동안 가습기살균제 물질이 폐섬유증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는 많았지만, 정확히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병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특발성) 폐섬유증'인 이유다. 때문에 옥시·애경 등 가습기살균제 업체에서는 자사 제품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해보상을 미뤄왔다. 이달 초엔 두 업체가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 최종 조정안에 반대하면서 겨우 마련된 사회적 협의 기회마저 무산될 위기다.
그러나 이번 연구로 가습기살균제 물질과 폐섬유증 인과관계의 '큰 그림'은 그릴 수 있게 됐다. 실험쥐 폐에 PHMG-P를 주입하자 1시간 후부터 폐세포들이 죽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항염증 반응이 일어났지만, 이상하게도 3시간 후부터는 항염증 반응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손상된 폐 조직을 치료해야 하는 면역체계가 정상 작동을 멈춘 셈이다. 박 교수는 "수십 년간 면역 독성 실험을 해왔지만, 이렇게 빨리 면역반응이 떨어지는 결과는 처음 봤다"며 "항염증 반응이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서는 더 파고들어야 하지만 최소한 이번 연구로 가습기살균제 물질이 어떻게 폐섬유증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는 찾은 셈"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가 특히 주목한 점은 선행 연구들이 '논문을 위한 실험'에 불과했다는 지점이다. 가습기살균제와 관련한 대부분의 동물실험은 '근교계 마우스'를 활용했는데, 항염증 반응이 약한 종 특성상 실험 결과가 더 뚜렷하게 보여 논문 작성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증반응과 항염증반응이 동시에 균형을 이루는 사람(비근교계) 폐에서 일어나는 일을 증명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박 교수는 "실험이 어렵더라도 비근교계 실험체에서 원인을 찾아야 폐섬유증 환자를 위한 맞춤 치료 가이드라인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폐섬유증은 원인불명이기 때문에 완치할 수 있는 치료제가 전무한 실정이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표면화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화학제품 판매승인 과정에서 호흡기 안전성 검증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호흡기 독성 데이터, 특히 반복 노출에 대한 데이터 제출이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판매 금지된 화학물질 대안으로 사용되고 있는 다른 화학 물질들도 같은 과정으로 폐섬유증을 유발하는지 등을 연구할 예정이다.
박 교수는 "소비자들은 당연히 안전하니까 판매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데,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라며 "더 이상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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