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패션칼럼니스트 박소현 교수가 달콤한 아이스크림같은 패션 트렌드 한 스쿱에 쌉쌀한 에스프레소 향의 브랜드 비하인드 스토리를 샷 추가한, 아포가토같은 패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드라마 '사내맞선'의 인기는 오징어 게임과는 다른 결로 한국 콘텐츠가 얼마나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한국식 클리셰(Cliché: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패턴)도 스토리텔링에 따라 세계가 좋아하는 불고기 같은 한국 콘텐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스토리텔링과 버금가게 '아름다움'으로 승부하는 장르가 있는데, 바로 '로판' 즉, 로맨스 판타지 웹툰(로판 웹툰)이다. 여성들에게 인기인 이 장르물은 그림 작가들이 손목을 갈아 넣어서 만든다고 한다. 바로 로판 웹툰이 중세 유럽을 주배경으로 하기에 멋진 건축물과 꽃을 가득 채운 정원부터 중세 귀족들이 입는 레이스와 프릴이 가득한 옷을 스토리와는 별개로 엄청나게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로판 웹툰 속의 옷은 늘 여자 주인공(여주)의 자존감 회복, 사랑의 확인 등 독자의 대리만족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상황의 극대화를 위해 로판 웹툰은 남자 주인공(남주)의 주로 3가지 양상을 모두 또는 선택적으로 보인다. 집착 광공, 미친 폭군, 여주 한정 댕청미(여자 주인공에게만 한정된 댕댕이·강아지같이 멍청할 정도로 강아지가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무한한 믿음과 사랑을 보임)이다. (유사한 남성용 웹툰에선 별 볼일 없는 남주가 미모의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그 세계관을 제패한다)
이런 로판 웹툰 남주들은 자신들의 성격적 결함을 채워주는 여주의 마음 씀씀이에 반해서 여주들의 옷과 치장에 아낌없이 돈을 퍼붓는다. 남주는 비싼 맞춤 드레스숍에 가서 여주에게 예쁜 드레스를 여러 벌 입혀 보고 패션쇼처럼 그녀를 치장시킨다. 그리고 남주는 '(금화 주머니를 내려놓으며) 이 가게에 있는 옷들 전부 집으로 보내주게'라는 클리셰 대사를 친다. 현대물 재벌 3세 남주의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라는 대사가 초라해질 지경이다. 그런데 세상에 찌든 생각 같지만 왜 로판 웹툰의 남주들은 지금 같은 부동산 대란 시대의 독자들이 여주에게 땅이나 집이 아닌 옷을 사주는 장면을 보도록 할까?
아마도 그건 로판 웹툰의 글 작가들이 '패션 테라피' 효과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미국에서 시작된 '패션 테라피 프로젝트'는 주목받는 옷 입기로 삶의 가치를 상실한 이들의 자존감 회복을 돕고자 했다. 그래서 지역 병원의 여성 정신 질환자들에게 최신 유행 옷을 입히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한 후 패션쇼를 하는 시도를 했다.
프로젝트에 소개된 한 여자는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중증 자기부정 환자였다. 그녀는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먹곤 했는데, 그 상태가 심각해서 질긴 가죽옷도 먹어 버릴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프로젝트를 통해 실크 스타킹과 아름다운 롱 드레스로 치장해서 거울 앞에 세우자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인정하게 되었고 더 이상 옷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드레스와 거울은 그녀의 가치를 환기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로판 웹툰의 드레스는 그렇게 독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환기하는 거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콘텐츠는 대중의 거울이다. 로판 웹툰은 현실에 찌든 우리에게 10분짜리 안전한 현실 도피처를 제공한다. 만약 현실에서도 그들처럼 또 패션 테라피처럼 드레스 패션쇼를 즐기고 싶다면, 소셜 미디어에 #드레스카페 #드레스프로필 #드레스스튜디오를 검색해보자. 중세 황태자비가 울고 갈 현대 여성들의 사진들이 가득하다. 어쩌면 이 인기는 머지않아 바디 프로필과 양대산맥이 될지도 모른다. 인기 콘텐츠는 늘 전에 없던 부가 산업을 만드니 말이다.
눈으로만 하던 로판 웹툰 도피를 현실에서도 드레스를 입고 찍고 만끽하며 자신의 가치를 한 번씩 '새로고침'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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