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슈퍼 사건 피해자 최성자·박성우씨
범인 몰린 '삼례 3인조' 재심 도우려 백방
"가짜 살인범 알고 나니 되레 죄인 기분"
"공권력 역할 못해 아픔이 오늘 일처럼"
"검사 뒤늦은 사과? 용서하니 마음 편해져"
"움직이면 죽여버린다. 가만히 있으면 남편과 자식은 살려주겠다."
자연스러운 경상도 억양과 말씨. 삼례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피해자 최성자(57)씨는 23년이 지난 지금도 '그놈 목소리'가 생생하다. 당시 34세에 불과했던 최씨의 삶을 파고든 끔찍한 강력범죄.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서 시고모인 유모 할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나라슈퍼를 운영하던 그의 인생은 그날 이후 송두리째 바뀌었다.
1999년 2월 6일 오전 4시 40분쯤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청테이프로 최씨의 눈과 입을 막았고, 가죽 벨트로 손과 발을 묶었다. 목에는 흉기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남편도 이미 제압된 상태. '오늘 죽을 수도 있겠다.' 이불로 덮인 다섯 살 자식을 꼭 끌어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현금과 패물을 뒤지던 강도는 유 할머니가 자고 있던 큰방으로 건너갔다.
"누구야!" 유 할머니의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이내 고요해졌다. 범인이 도망친 뒤 급히 유 할머니 방으로 갔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열흘 뒤 경찰에서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이른바 '삼례 3인조' 임명선·최대열·강인구씨였다. 당시 19세와 20세에 불과했던 가난하고 어눌한 동네 아이들이었다. 원망했지만, 처벌받았으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년 뒤 이들이 '가짜 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기 전까지 말이다.
살인범 '무죄' 탄원 나선 피해자…"공권력이 제 몫 했다면"
지난 17일 전북 전주의 한 카페에서 최성자씨와 유 할머니의 막내사위 박성우(63)씨를 만났다. 그날 일을 묻자 최씨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최씨는 아직도 해가 지면 밖을 나가지 못하고, 진범 목소리와 비슷한 경상도 사투리만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다. 그는 "수사권을 갖고 있는 경찰과 검찰이 각자 자리에서 제 몫을 다했다면 위로받고 잊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지금까지도 오늘 일처럼 떠올리며 그날을 살아야 하는 게 가장 아프다"고 털어놨다.
경찰의 '삼례 3인조' 체포 후 검찰 기소를 거쳐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기까지는 8개월밖에 안 걸렸다. 수사와 기소, 재판이 사실상 '묻지마' 초고속 방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 직후인 2000년 1월 부산지검에서 진범인 '부산 3인조'가 검거됐다. 이들의 진술은 서로 엇갈렸던 '삼례 3인조' 진술과 달리 사건 정황과 꼭 맞아 떨어졌다. 슈퍼 약도를 정확히 그렸고, 훔친 패물의 모양과 색깔 묘사도 일치했다. 유 할머니 옷이 젖어있던 이유에 대해서도 '숨을 안 쉬어 물을 떠먹이려 했다'며 그간 알 수 없었던 부분까지 설명했다.
그 무렵 천주교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던 박모씨가 "삼례 3인조는 진범이 아니다"라며 우두머리로 지목됐던 임명선씨를 만나봐 달라고 최씨에게 요청했다. 임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최씨는 '삼례 3인조'가 범인이 아니란 확신이 생겼다. 부산지검을 방문해 '부산 3인조'의 조사 영상 녹화를 본 최씨는 주저앉았다. 바로 그놈 목소리였다. 최씨는 이후 "죄 없는 사람은 빛을 보게 해달라"며 탄원서를 쓰는 등 사법 피해자인 '삼례 3인조'를 돕기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최씨가 '삼례 3인조'를 도왔던 이유는 또 있었다. 최씨는 "삼례 3인조가 잡혔을 때 경찰에 '범인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무서운 사람들 봐서 뭐하냐'고 만류했다"며 "당시엔 피해자 배려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고 말했다. 그는 "그땐 경찰이 정의롭다고 생각했다"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이 아이들은 범인이 아니다'라고 바로잡고 싶다"고 한탄했다.
'가짜 살인범'에 외려 죄책감…"용서하니 편해지더라"
2016년 '삼례 3인조'의 재심 개시 결정 뒤 무죄 선고에 큰 역할을 한 자료는 유족 박성우씨가 촬영했던 사건 발생 당시 현장검증 영상이었다. 영상에는 경찰의 강압수사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박씨는 "누가 장모님을 가해했는지 기록을 남기려고 촬영을 했는데 이상했다"며 "범인이라고 보기엔 스스로 움직이는 게 하나도 없었고, 경찰이 때려가면서 '너 인마, 이렇게 했잖아'하면서 시키더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영상에는 경찰 지시에 '삼례 3인조'가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담겼다. 경찰들끼리 '네가 감독이냐'며 웃고 '얘는 탤런트고, 쟤는 신인이다'라고 말하는 등, '삼례 3인조'에게 연기를 시킨 정황도 등장한다. 박씨는 "가짜 살인범이란 걸 알았을 때 가족을 잃은 내가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며 "소외된 애들을 공권력이 살인자로 만들었단 사실을 알고는 도와야겠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진범의 자백도 '삼례 3인조'의 누명을 벗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6년 1월 '부산 3인조' 이모씨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고백하며 사과하자, 피해자들은 용서했다. 박씨는 "이씨에게 '죄 없는 세 아이들이 살인자가 됐으니 진범이라면 재판에서 증언해달라, 그럼 용서하겠다'고 말했더니 용기를 내줬다"며 "가족을 죽인 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다니… 이게 우리나라 사법 현실이란 걸 느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진범의 사죄 이후 2017년 2월 1심 배석판사였던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사과했다. 그리고 지난 17일 주임검사였던 최성우 변호사도 이들을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피해자들은 어떻게 이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최성자씨는 특히 진범의 사과 의사를 듣고 몹시 망설였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용서하겠나. 하지만 재심 법정에서 증인으로 선다니 진실을 바로잡으려 용서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진범과 배석판사, 주임검사를 만나서 '나도 잊을 테니 털어버리라'고 말하고 나니 내 마음도 편해지더라"고 밝혔다.
박씨도 "그간 수사에 책임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며 "늦게나마 최성우 변호사가 직접 찾아와 사과한 것 자체는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용서해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항상 '남을 돕고 살라' 했던 장모님도 이제 편안히 가실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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