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일상, 남겨진 상흔] <3>숨은 현장 일꾼의 호소
편집자주
코로나19가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일상이 2년여 만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상처마저 회복된 건 아니다. 제대로 돌보지 않은 상처는 덧나고 곪아 사회적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다. 또 다른 팬데믹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문제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백신 피해자, 후유증, 의료 인력, 교육 문제 등에 대해 4회에 걸쳐 알아본다.
1년 전 그날, 밤잠을 설쳤다. ‘그때 산소를 조금 더 넣었다면 나아졌을까.’ 낮에 떠나 보낸 40대 후반 환자 A씨가 꿈속에서도 나타났다. 살려내지 못했다는 중압감에 우울증이 올 정도였다. A씨는 배성진(49) 체외순환실장에게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서울 영등포구 한림대 강남성심병원에서 일하는 배 실장은 중환자의 심장과 폐 기능을 대신해주는 ‘체외순환사’다. 그는 체외순환사를 “보이지 않는 조력자”라 표현했다. 코로나19와 싸워 온 의료 현장엔 의사, 간호사 외에 그들도 있었다.
급격히 무너지는 코로나 환자에 '트라우마' 생겨
배 실장이 A씨를 처음 만난 건 작년 초 응급실에서였다. 숨도 잘 못 쉬는 채로 실려 온 A씨는 몇 시간 안 돼 중환자실로 옮겨져 ‘에크모(ECMO)’를 달았다. 에크모는 환자의 심장과 폐를 대신해 혈액과 산소를 공급해주는 인공심폐장치다. 아무리 코로나19라도 40대 남성이 에크모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급격히 나빠지는 건 드문 경우였다.
“그래도 젊으니까 잘 이겨낼 거라고 생각했죠. 나이가 비슷해서였는지 유독 마음이 갔어요.”
하지만 CT(컴퓨터단층촬영)를 찍을 때마다 폐가 빠르게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지병도 없고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었다. 원인은 바이러스밖에 없었다. 결국 폐 이식을 기다리다 A씨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에크모에 생명을 의지해 온 70일 동안 배 실장은 매일 곁을 지켰다.
인공심폐 맡다 보니 환자 곁 오래 지켜야
체외순환사는 인공심폐장치 전문가다. 원래는 심장을 다루는 흉부외과 의사와 함께 주로 수술실에서 일한다. 수술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멈춘 환자의 심폐 기능을 외부에서 기계로 유지해주는 역할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중환자실과 응급실에도 체외순환사에 의존하는 환자가 크게 늘었다. 코로나19 중환자 대부분이 A씨처럼 에크모를 달았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배 실장이 참여한 심장수술은 2,000건이 넘는다. 경력 25년의 베테랑 체외순환사이건만 코로나19는 두렵고 힘들었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도 겪었지만, 코로나19는 “폐 기능 떨어지는 속도가 메르스보다 훨씬 빠르다”고 했다.
그러니 코로나19 중환자실이 더 급박하게 돌아갔다. 가족끼리 저녁 먹다가도 병원 연락 받고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렇게 지난 2년여간 수많은 코로나19 중환자의 에크모를 켤 때부터 끌 때까지 지켜봤다. 의사보다 더 오래 환자 곁에 머물 때도 많았다.
올 초 코로나19 중환자실에 들어온 30대 여성 B씨 때도 그랬다. 선천성 당뇨병이 있어 체내 염증반응이 심했고 콩팥 기능도 나빴던 B씨는 이틀 만에 에크모에 생명을 의지하는 처지가 됐다.
“다시 젊은 중환자를 만나니 A씨가 생각났어요. 이번엔 꼭 살리고 싶었죠.”
하지만 자꾸 혈압이 떨어졌다. 에크모 돌리는 내내 곁에서 마음 졸이며 수시로 혈압을 확인했다. 혈압이 떨어질 때마다 의사와 상의해 승압제(혈압을 올리는 약)나 수액으로 끌어올리길 반복한 지 20여 일. 드디어 B씨는 에크모를 뗐다. 배 실장의 트라우마도 B씨와 함께 조금씩 회복돼 갔다.
코로나 겪으며 체외순환사에 대한 인식 달라져
코로나 환자를 가장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는 이들이지만, 코로나 대유행 이전까지만 해도 체외순환사는 큰 존재감이 없었다. 일반인은 물론, 같은 병원 내에서도 이들이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코로나19 중환자가 폭증하면서 에크모 수요가 크게 늘어난 지난해 말 이후, 이제는 중환자를 보려면 체외순환사가 있어야 한다는 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는 코로나19 에크모 대응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 대한체외순환사협회에 공로상도 줬다.
사실 한국에 체외순환사가 등장한 건 1970년대부터다. 1996년 체외순환사협회까지 생겼는데도, 현재 220명이 전부다. 학계나 병원이 임상병리사나 간호사를 자체적으로 교육해 체외순환사로 충원해왔기 때문에 소속도 병원마다 흉부외과, 간호부, 임상병리과 등 일정하지 않다. 일본은 체외순환사 1명이 심장수술을 1년에 33건 하지만, 우리나라는 40건 한다. 체외순환사 2명이 필요한 심장수술에 1명만 들어가는 병원도 많다.
“실제 코로나19 중환자를 보는 병원에서 체외순환사가 없어 담당 의사가 다른 병원에 연락해 가며 조언을 구하는 일도 있었다”고 배 실장은 귀띔했다. 수술방에 들어가 있는 배 실장을 코로나 중환자실에서 급하게 찾는 아찔한 상황도 종종 생겼다. 언제 닥칠지 모를 다음 감염병 대유행을 감안하면 220명은 너무 적다.
국내 겨우 220명뿐… 보건의료의 '한 축' 인정받길
“일본, 미국처럼 우리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죠. 교육 기회와 임상 경험을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게 시급합니다.”
심장수술과 감염병 치료를 하는 병원은 자격을 갖춘 체외순환사를 일정한 수만큼 확보하도록 제도화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다. 마침 흉부외과학회가 체외순환사 자격인증제를 시작했다. 지난해 배 실장을 포함한 80명이 처음으로 공식 자격을 얻었다. “코로나19가 의사, 간호사 외에 다양한 보건의료 전문 직종에도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배 실장은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