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이쿠노구 쓰루하시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는 특별했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예선 없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라는 매혹 덕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던 전국의 고등학교들이 대거 참가했고, 그 학교들의 학생들, 학부모들 넓게는 지역사회가 응원했다. 뜨거운 여름방학의 한복판인 8월에 열린다는 점 역시 인기의 요인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학생들이 마음껏, 적어도 눈치는 좀 덜 보고 야구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자료 영상을 보면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봉황대기의 결승전에는 관중석이 외야까지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다.
1982년에 열린 제12회 봉황대기는 여러모로 좀 더 특별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유치를 위해 1977년부터 짓기 시작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이 그해 7월에 완공됐다. 1982년은 프로야구 원년이기도 했다. 8월 1일 MBC 청룡과 롯데 자이언츠가 잠실야구장 첫 경기를 치렀다. 게다가 9월 4일부터 14일까지 11일간은 이 구장의 존재의미였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해 한국은 온통 야구였고, 봉황대기는 염천의 사막처럼 달아오른 야구 열기의 정점에 있었다.
소년들은 이 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다. 1982년에만 건넌 것은 아니었다. 1956부터 1997년까지 42년 동안 약 620명의 재일동포 야구소년들이 하얀 운동복 가슴 한복판에 ‘재일동포’라는 한자를 세기고 현해탄을 건너 한국의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펼쳤다. 초기에는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모국 방문’ 등의 타이틀을 건 초청 경기 형식이었으나 1972년 제2회 봉황대기 대회부터는 재일동포 팀으로 토너먼트전에 참가했다. 팀이라고는 하지만 급조였고 임시였다. 특히 재일동포 팀의 선수를 찾는 과정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조금 공포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 공포의 일면을 보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면 이렇다. 1951년에 아이치현 니시오시에서 태어난 아라이 쇼지는 고등학교 상업과 3학년이던 1970년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열린 그해, 고도성장의 한복판에서 기업들이 오히려 사람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을 때, 아라이 쇼지는 좀처럼 일자리를 잡지 못했다. 히타치의 구인광고를 보고 일류 대기업이라면 득실만을 따질 것이라는 신념 아래 이력서를 채웠다. 합격 통지를 받았고, 호적등본을 제출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재일동포 아라이 쇼지는 호적등본이 없었다. 외국인등록증명서를 가져가겠다는 말에 히타치는 채용을 유보하더니 이틀 후 “일반 외국인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라이(新井) 쇼지의 본명은 박종석이다. 밀양 박씨 중에는 아라이가 많다. 신라(新)의 박혁거세가 우물(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범준 작가가 3년간 취재한 책 '일본제국 vs. 자이니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재일동포 야구단 주최 측은 이름으로 선수들을 찾았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한국인 선수가 있으면 알려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200여 통 프린트해서 일본 각기 200여 개 학교에 보낸다. 2,700여 개의 고교팀들 중에서 야구 명문고나 수준급의 학교를 추린 것이다. 야스다(安田), 도쿠야마(徳山), 가네야마(金山), 다카야마(高山)의 성을 가진 사람들을 골랐다. 안씨, 홍씨, 김씨, 고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 개명할 때 주로 사용한 성이다. 이름 끝에 ‘식(植), 복(福), 환(焕), 자(字)’자가 들어간 사람도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며 보냈다.
그럼에도 경기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은 소년들은 일본의 각 학교 소속으로 여름 고시엔 대회를 마친 후 팀에 급하게 합류했다. 연습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팀은 처음 만난 감독과 함께 규슈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내려 서울로 이동했다. 1982년의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급조된 팀이라 일찍 토너먼트에서 미끄러져 일본으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 이기고 또 이겼다. 화랑기대회 우승팀 북일고를 꺾고 3회전을 통과해 8강에 올랐고, 8강에선 마산상고, 4강에선 광주제일고를 꺾었다. 결승전은 새로 지어진 5만석 규모의 잠실야구장에서 치러졌다. 2013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그라운드의 이방인'(프로듀서 조은성, 감독 김명준)은 약 30년 전인 1982년 8월 21일 잠실구장에서 군산상고와 우승을 다퉜던 재일동포 야구단의 멤버들을 찾는 데서 시작된다. 제작진의 목표는 이들을 다시 잠실의 그라운드에 세우는 것이었다.
“좋은 기억이 없습니다.” 30년 전의 야구팀을 찾는 제작진에게 재일동포 야구단의 멤버 중 어떤 이가 내놓은 대답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재일동포의 경기는 보통의 고등학생 야구 팀 사이의 대결 구도가 아니었다. 특히 결승전은 한국인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에 사는 고등학생 팀과 호남의 자랑 군산상고가 우승을 다투는 대결이었다. 관중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군산상고를 응원했다. 경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뒤의 기억도 좋지 않았다. “(한국에서 돌아와) 취직도 야구선수가 되는 길도 막혔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작진은 30년 묵은 서운함과 그보다 깊은 설움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어렵사리 연락을 돌려 ‘만나보겠다’는 당시의 멤버 7명을 찾았다. 양시철, 김근, 권인지, 배준한, 강효웅, 장기호, 홍수영이 그 이름이다. 제작진은 이들의 첫 만남을 주선했다. 30년 만의 재일야구단 동창회였던 셈이다. 이들은 오사카의 한 허름한 역에서 만나 서로를 반가워했다. 허름한 역에서 나와 허름한 골목을 지나 허름한 가게에 들어서 자리를 잡았고, 삼겹살과 김치를 굽고 참이슬을 마시며, 30년 전의 추억을 회상했다. 이 술판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오사카시 이쿠노구의 쓰루하시역 인근 야키니쿠 집이다.
아라이 쇼지는 일본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히타치를 상대로 해고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범준에 따르면, 조선인들 사이에서 아라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민족적 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자가 느닷없이 민족 차별 운운하고 있다. 고작해야 히타치라는 재벌의 착취 도구가 되려는 인간이 감히 민족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아라이 자신도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최종 구두 변론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도록, 인간성을 되찾도록 히타치가 도와주었다. 나는 이미 이긴 것”이라고 밝혔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1972년 와세다대학교 법학부 졸업을 앞둔 가나자와 게이토쿠는 아사히신문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품고 교내 취업 상담실을 찾았다가 “메이저 신문사에 외국적자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대답을 듣고 상담실을 나오면서 조선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이름은 김경득이다. 1976년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국적으로 바꾸지 않고 한국적으로 사법연수생 수습 채용신청서를 낸 인물이자, 한국적 일본 변호사가 된 최초의 인물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민족’이란 단어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려서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자유로웠던 모교의 학풍 탓일 수도 있고, 그런지와 브리티시 인디 팝만 듣는 친구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개량 한복을 입고 춤을 추는 집단을 보면 기겁을 하고, 술자리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선배를 멀리했다. 지금도 지나치게 민족을 강조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오래 나누지 않고 그런 글도 읽지 않는다. 그런 반감은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벽에도 부딪혀 보지 않았기에 생긴 안이가 아닐까? 이름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라 당연하게 누렸던 편리는 아니었을까? 모난 곳 없이 자랐다는 아이들이 알고 보면 사실 모자란 것 없이 자란 아이들인 것처럼.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애플TV '파친코'에서 영도에 살던 선자는 이삭과 함께 오사카로 건너간다. 그녀의 눈앞에 놓인 것은 믿을 수 없을 만치 깨끗하고 화려하며 미래적이다. 그러나 선자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땅을 파고 철마를 달리게 하겠다는 선진 문명의 동쪽 구석, 남들이 버린 내장(호루몬)을 구워 팔고, 길거리에 돼지를 풀어 키우는 곳에 선자는 가닿는다. 그곳이 80년 뒤 재일동포 야구단 아저씨들이 술잔을 기울이던 이쿠노구 쓰루하시다. 그곳에서 아저씨들은 ‘고향의 봄’을 함께 부른다. 30년 전 봉황대기에서 6번을 이기며 결승까지 올라가며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다. 재일동포 야구단이 상대 팀에 승리할 때면 승리교의 교가 대신 ‘고향의 봄’이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10년도 더 전에 쓰루하시에 처음 갔을 때를 기억한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더운 여름이었다. 역에서 내려 JR선에 거의 연결되어 있다시피 한 아케이드로 들어서자마자 폭발적인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저녁이었는데, 이미 야키니쿠 집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불에 탄 지방의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장을 잔뜩 구워먹고, 거나하게 취했던 것 말고는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만약 지금 다시 그곳에 간다면, 정말 많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30년 넘도록 기억에 남았다는, 재일동포 야구단의 ‘고향의 봄’을 듣고 나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오사카에 사는 친구 말로는 김치가 한국보다 달다는데, 꼭 먹어보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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