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법정은 고통의 경연장이다. 매기일 절박한 한숨과 눈물 속에 재판이 열린다. 법정의 풍경을 묘사해 보라고 하면 비탄에 잠긴 사람들 말고는 그릴 게 없다. 피해자의 고통은 마땅하다. 범죄 피해자의 자리 이외에 극한의 슬픔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뻔뻔스럽게도 피고인 역시 고통을 호소한다. 애통함의 전시 속에서 판사는 고통과 슬픔에 절여진다.
어떤 고통이 사람을 무너뜨리는가. 흉악하고 끔찍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지켜본 바로는 꼭 그렇지 않다. 대단한 원한 때문에 사람을 살해하는 게 아니다. 욕 한마디 들었다고, 어깨빵 한 번 당했다고 칼로 찌른다. 큰돈이 없어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한 달치 월세나 한 끼 식대가 없어도 생을 포기한다. 등짐 위에 떨어진 깃털 하나에 낙타가 풀썩 주저앉듯, 작지만 확실한 고통이 사람을 절망으로 내몬다. 물론 낙타는 깃털 때문이 아니라 누적된 수만 보의 걸음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 범죄자나 파산자에게도 범행과 파산 이전에 폭력과 학대, 대를 이은 빈곤이라는 무수한 걸음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잠시 가압류 등 잡다한 사건을 처리하는 신청단독 재판부를 맡은 적이 있다. 그 업무 중에 '압류금지채권의 범위 변경신청'이 있었다. 예금통장이 압류된 채무자가 생계가 어려우니 압류를 일부 풀어달라는 신청이다. 법에 정해진 한도는 185만 원인데 실제 신청은 20만 원도 있고 50만 원도 있었다. 전체 계좌를 탈탈 털어 이 정도밖에 없다는 말이다.
새 정부의 인사와 희대의 살인범 얘기로 지면이 도배되는 동안에도, 가난한 청년과 자영업자와 주부가 빚에 몰려 개인파산을 신청하고, 유치원비를 내는 잔액 59만 원짜리 통장을 압류당해 법원에 그걸 풀어 달라 요청하고, 직장과 집을 잃고 급기야 아이도 잃고, 일당 10만 원을 벌려고 기꺼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금책이 된다. 자식들의 짐이 되기 싫은 80대 노인은 소금꽃 활짝 핀 점퍼를 걸친 채 파지를 줍고, 길가에 세워 둔 자전거를 싣고 가다 절도범으로 몰려 즉결심판을 받는다. 법원에 접수되는 사건 중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건은 극히 일부고, 소액, 지급명령, 약식, 즉결, 과태료, 신청, 비송 같은 소소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크든 작든, 매사가 그렇듯 고통도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나 익숙함만으로는 고통을 넘어설 수 없다. 고통에 길드는 건 오히려 경계할 일이다. 무감한 고통은 부지불식간에 존재를 풍화시켜 가루로 만든다. 아픔은 아파야 하고, 슬픔은 슬퍼야 한다.
이제 곧 정부가 바뀐다. 정부조직, 권력 형태, 수사권, 부동산, 경제성장률처럼, 역사가 바뀔 무렵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서사의 스케일은 장대하다. 이런 시국임에도 한가한 나는, 압류된 예금을 풀어줄지, 마트에서 세 차례 햄을 훔친 노파의 벌금을 또 한 번 봐줄지 따위를 놓고 고민한다.
하지만 나는 내 번민의 무게를 조금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내각의 구성은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없지만, 예금 59만 원과 벌금 5만 원은 지금 당장 누군가의 다리를 꺾는 육중한 깃털이 될 수 있음을, 사람을 무너뜨리는 작지만 확실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사가 언제까지 사람들을 서 있게 할 수는 없다. 이건 원래 정치의 몫이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소소한 불행을 너무 많이 보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정치란, 소확행으로 눈속임하지 않고, 더 크고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며, 고통에 있어서만큼은 내력을 잘 살피고, 하찮은 아픔 하나까지 헤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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