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권정현 더뉴그레이 대표, "아저씨를 '패피'로" ①
편집자주
<일잼 원정대>는 '현대인의 일'을 탐구하는 콘텐츠 실험실 '커리업(caree-up)'의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일에서의 재미'라는 희소자원을 찾아 정박하지 않고, 원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동력 삼아 일하는 방법'을 수집합니다.
산뜻한 기장의 롤업 청바지, 빈티지 워크 재킷, 캔버스 운동화에 볼드한 뿔테 안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비스듬히 선 이들의 뒤태를 보면 영락없는 요즘 ‘힙스터(hipster)’입니다. 자세히 보면 ‘어랏’ 싶어요. 포마드로 미끈하게 벗어 넘긴 그들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회백색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눈에 들어옵니다. 틱톡 누적 조회수 1억, ‘60대 방탄소년단’이라 불리는 이들의 정체는 평균 나이 63.5세의 시니어 패션 인플루언서 그룹 ‘아저씨즈’예요.
인스타그램을 자주 이용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마 피드에서 이분들 영상, 한번쯤은 본 적 있을 거예요. 영 엉거주춤하기만 한 댄스 실력, 하지만 그들 자신만의 흥으로 ‘덩실덩실’ 흔들어대는 스웩(Swag)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골 때리게 색다른 ‘비주얼’입니다. 그래서 자꾸 눈이 가죠.
근데, 아셨어요? 보아에겐 이수만이, 원더걸스에겐 박진영이, 방탄소년단에겐 방시혁이 있었듯, 이들 ‘아저씨즈’를 발굴하고 기획한 ‘백스테이지’의 마스터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
한때는 이 아저씨들 역시, 이름없는 ‘할아버지역’ 엑스트라였다고 해요. 홈쇼핑 생방송 속 ‘안마의자에 앉아 미소 짓는 할아버지 1번’, 보험 광고 속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할아버지 2번’이었던 거죠. 이 익명의 시니어 배우들을 한 명 한 명 모아다가 등산복과 금장벨트를 압수하고, 후드티에 조거 팬츠를 입힌 사람이 있었으니, 패션 콘텐츠 브랜드 ‘더뉴그레이(THE NEW GREY)’를 만든 권정현 대표입니다.
Prologue. 더 뉴그레이, 그래서 뭐하는 곳? 권정현, 이 사람은 대체 누구?
패션 콘텐츠 브랜드 ‘더뉴그레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아빠 프사 바꾸기 메이크오버 프로젝트’ 때부터예요.
아저씨들은 대개 딸이나 아들 손에 붙잡혀 끌려왔어요. 하나같이 때 탄 점퍼 아래 목둘레가 늘어난 카라 티셔츠, 무릎 나온 정장바지에 번쩍거리는 낡은 구두 차림이었죠. 쉴새 없이 볼멘소리를 뱉었죠. “호박에 줄 그어봤자 수박 되냐”고, “이런 거 도저히 남사스러워 못한다”고요.
그러다가도 권 대표의 손길을 거치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고 해요. “아따, 저 청년 기술 한번 신묘하네!” 이들의 패션 전후를 비교한 사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물론 각종 커뮤니티에 순식간에 퍼졌어요. 급등하는 팔로우 수만큼, 여기저기서 요청이 빗발쳤죠. “우리 아빠도 패션지 편집장처럼 변신시켜주세요!”
그렇게 권 대표는 5년째 ‘대한민국의 아저씨’들을 수백 명씩 만나고 있어요. 메이크오버를 할 때마다 어리둥절한 설렘으로 들뜨는 아저씨들의 표정들을 보는 게, 매번 새롭게 좋다고 하네요.
에잇, 관상만 봐도 ‘금수저’ 같다고요? 또또또 성공 서사 자랑 아니냐고요?
권 대표 이력을 ‘스윽’ 살펴보면, 영리한 전략과 남다른 센스로 한번에 니치마켓을 정조준한 ‘엘리트 사업가’처럼 보여요.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 인턴 경력, 남다르게 멋진 스타일까지…. 어쩐지 ‘매끈하고 근사한 성공의 길’만 걸어왔을 것 같다면 한참 오해랍니다. 불과 4년 전, 사업을 무리하게 벌이다 신용등급이 10등급까지 떨어져 빚 독촉에 쫓겼고, 매달 200만 원이 넘는 이자를 갚기 위해 최근까지 투잡으로 수학 과외를 뛰었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대단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요. ‘남다른 맷집’으로 위기를 견뎌온 그에게 그 원동력을 물으니 못 말리는 확신과 고집이 있었다 해요. ‘이건 나밖에 못하는 일’이라는 확신, 그러니 ‘그만둘 수 없다’는 고집. 고집은 지키되, ‘아집’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넘어졌던 길을 거꾸로 되돌아 나와 다시 출발점에 선 거죠. 정현님의 스토리, 좀 더 자세히 들어보실래요?
Chapter 1. 그 4수생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Monologue. 권의 독백
스물둘, 4수를 했어. ‘의대’ 가려고. 아, 뭐야. 지나치게 전형적인 ‘헬조선 입시 잔혹사’ 아니냐고? 맞아, 흔한 이야기긴 해. 사수 하기 전엔 부모님 어깨에 힘깨나 들어갈 만한 명문대 공대에 다녔어. 앞길 탄탄하다는 원자력공학과였는데, 웬걸. 수업에서 하는 공부가 진짜 끔찍한 거야. 눈앞이 깜깜하더라. ‘와, 나 뭐 해먹고 살지.’ 생각해보니 내 꿈은 대학 가는 거였어. 그다음이 없었거든?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거야. 주입된 욕망으로만 살아온 허깨비처럼.
고등학교 동창 중 의대 간 애들이 많았어. 부모님 몰래 노량진에 독서실을 끊었어.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상자 모양의 독서실 책상 앞에 다시 앉아있으려니 죽겠는 거야. '정현아, 너 진짜 피 볼 수 있어? 공대 공부보다 더 빡세다는 의대 공부는 맞을까?' 아닌 걸 너무 잘 알았지. '그럼 너 뭐 좋아하는데, 뭐 잘 할 수 있는데?' 그때 처음 나한테 물어봤어. '아, 하나 있다. 나 옷 좋아하네.'
(권정현 대표 인터뷰 내용을 ‘1인칭 독백’ 시점으로 기자가 각색했습니다.)
커리어 고민을 안고 있는 직장인들에게서 자주 나오는 말이 있어요.
"저는 대학 때 전공이 평생의 족쇄가 된 것 같아요."
교사 말마따나, 부모 소망 따라, 어쩌면 대부분 수능 성적 따라, 고작 ‘열아홉 살’에 선택한 진로가 평생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닐 줄은 몰랐다고요. 수를 끔찍이 싫어하는 데 경제학과에 간 사람, 아픈 사람 보는 걸 고통스러워 하는 데 간호학과에 간 사람, 피 못 보는 데 공부 잘한다고 의대에 간 사람… 터놓고 ‘말’을 안 할 뿐, 주변에 얼마나 흔한지 모릅니다.
정현씨는 결심해요. ‘전공이 내 족쇄가 되게 두지 않겠어.’ 4수를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온 그는 무작정 ‘패션 회사’의 문을 두드렸어요. 여성용 핸드백이 주력 상품인 패션 브랜드에서 ‘마케팅 서포터’로 일을 하게 됐죠. 대부분 디자인, 경영 전공 출신인 여학생 일곱에, 남학생이라곤 정현씨 혼자 딱 한 명이었어요. 무리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이단아’ 기질이 슬슬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게 이때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패션 쪽 일은 무엇이든 해보자’하고 덤빈 건데, 막상 뛰어드니 ‘광고와 마케팅’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니’ 싶었다고 해요. 그 전까지는 간 살짝 보고 ‘어? 이 맛 아니네’ 싶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일쑤였는데, 여기선 ‘이 맛이 내 맛이구나’ 싶었던 겁니다.
그 길로 정현씨는 광고 마케팅 관련 책을 몽땅 사다가 맹렬하게 읽기 시작합니다. 본인이 자주 쓰는 상품, 서비스를 타깃으로 잡아 ‘나라면 이거 어떻게 광고했을까’ 고민하며 아무도 봐주지 않을 기획안을 만들어 냈어요. 축구 선수가 매일 수백, 수천 번씩 같은 드리블을 연습하듯, 미친 듯이 습작을 뽑아냈죠.
당시 대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던 취업정보사이트인 ‘스펙업(up)’을 ‘스펙없’으로 비틀어 봤더니, 멋진 카피가 떠오르더래요. ‘스펙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인재가 되라.’ 그의 노트는 이런 아이디어로 빽빽해지기 시작했어요.
공대생이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딴짓’에 열을 올리니 학점은 바닥을 쳤습니다. 남들 취업 준비한다고 다들 토익 보러 다닐 때, 영어 공부는 담을 쌓았죠. (그는 서른세 살인 지금까지도 토익 시험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남들 다 못가서 안달인 대기업은 지원해 볼 생각도 안 하던 차에, 생뚱맞은 기회가 아닌 밤중에 감 떨어지듯 찾아옵니다. 졸업 수업 때 과제로 만들어 간 신사업 기획안이 교수 눈에 띄어, 얼떨결에 팔자에 없던 빅테크 대기업에 가서 인턴을 하게 된 것이죠.
Chapter 2. 대기업 부장님처럼 되긴 싫었다, 그럼 어쩔 건데?
Monologue 권의 독백
토익 점수 없음, 자격증 없음, 학점은 3점을 겨우 넘는 수준…. ‘흙스펙’인 내가 공채로 뚫는 건 불가능한 대기업에서 인턴을 했어. ‘고액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정규직이 될 기회가 눈앞에 있으니, 솔직히 혹했던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인턴을 하며 배운 건, ‘시간을 죽이는 방법’이었어. 옆자리 형이랑 만만한 편의점만 뻔질나게 드나들었지. 형이 하염없이 담배를 태우는 동안 나는 멍하니 딸기우유만 벌컥벌컥 들이켰던 기억이 나. 버텨야 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거기에선 ‘노동의 일종’이었으니까. 그냥 체념했던 거 같아.
실리콘밸리 견학을 다녀오면서 그 모든 상식이 파괴됐어. 돌아와서도 자꾸 어른거렸어. 자신의 페이스와 스타일에 맞게, 자유로운 형태와 스케줄로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때 우릴 인솔했던 부장은 밤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일정에 나오질 않았어. 회사를 20년 다니면 나 역시 똑같은 모습으로 늙어 있을 것 같더라. ‘매인 몸으로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싶지 않았던 거 같아. 시간의 통제권을 쥐고, 내 일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알고 싶었어.
그 길로 정현씨는 채용을 ‘완전 포기’하고 나왔습니다. 아쉬움은 없었어요. 자신은 ‘소속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요. 삼수 끝에 원하는 학교에 갔을 때에도, 날아갈 듯이 좋았지만 그 만족감이 한 달을 가지 않았다고 해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회사’에 다닌다는 프라이드(pride)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까? 며칠 못 갈 거라는 게 보였죠. 정현씨가 만족할 수 있는 자리는 ‘꾸준히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아저씨가 되고 싶은 거지?
패션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누나가 ‘너는 어쩐지 이런 멋쟁이 아저씨로 나이들 것 같다’며 슬쩍 보여줬던 외국인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정현씨 평생에 다시 없을 영감이 된 ‘닉 우스터’였어요.
1960년생, 예순둘의 나이인 닉 우스터는 ‘세계에서 가장 옷 잘 입는 남자’로 불리는 패션 인플루언서입니다. 키 168㎝에, 패션 디자이너도 모델도 아니었지만 그는 독보적인 스타일만으로 이미 아이콘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와이언 셔츠, 컬러 진, 야상 점퍼, 타이트한 반바지 등 ‘나이에 맞지 않는’ 전위적인 아이템을 시도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죠. 정현씨가 본 사진 속 그는 20대 젊은 청년들 사이에 빙 둘러싸여 있었죠. 그런데도 위화감이 없다니, 상쾌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닉 우스터 같은 아저씨, 그러니까 ‘쿨한데 세련된’ 아저씨를 주변에선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어? 이게 되게 새롭다. 내가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
그 길로 기획안을 썼습니다. 일명 꽃할배 패셔니스타 만들기.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기획안을 보내 타낸 초기 자본금 단 돈 100만 원. ‘자본금’이라고 부르기에도 쑥스러운 푼돈을 들고서, 그때부터 모델을 찾기 시작했죠.
지하철 경로 우대석부터 뒤졌습니다. 매번 ‘사기꾼’ 취급을 당했어요. 슬금슬금 다가서는 눈치만 보여도 손을 내젓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습니다. 명함도 없이 꾸깃꾸깃한 메모지에 번호라도 적어서 주머니에 넣어드리면 자식들이 전화해 따졌죠. “사기 치지 말아요. 우리 아버지가 모델 캐스팅이 됐다니 말이 돼요?”
맷집이 슬슬 한계에 다다를 무렵, 정현씨는 운명적으로 ‘그분’을 만났습니다. 우연히 찾아 들어간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백발 장발의 바리스타, 그의 첫 번째 모델이었죠. 냅다 앉아 커피 몇잔을 연거푸 주문해 마시다 어렵게 닉 우스터의 사진을 꺼내 보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분처럼 만들어드릴게요. 저랑 사진 몇 장 찍어보실래요?”
바리스타 할아버지를 모델로 룩북을 찍어 올리기 시작하자 페이스북 구독자가 순식간에 만 명을 넘었고, 꾸준히 찾아주는 팬들도 늘었습니다. 문제는 비즈니스 모델이었죠. 콘텐츠만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까요.
'사업 초짜' 이십대 중반 머릿속에서 나온 답은 뻔했습니다.
동대문 보세 옷을 떼어다 파는 평범한 쇼핑몰이었죠. 특별한 거라곤 모델이 백발의 중년 남성이라는 것뿐이었어요. 그가 만든 콘텐츠는 신박했지만, 쇼핑몰은 ‘전형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매출도 시원치 않았죠.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로 ‘홍대 패션을 즐기는 아저씨’라는 아이콘을 만들어 냈지만, 그걸 영리하게 비즈니스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거죠.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점점 더 대담해졌습니다. 돈이 벌리는 사업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투자’랍시고 친척들에게까지 돈을 빌리기 시작했죠. 카페를 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봤던 ‘일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외부인들과 네트워킹도 하는’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나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멋들어진 공간 거점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의 표현대로 ‘겉멋만 세게 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현씨는 카페 사업을 몰라도 한참 몰랐습니다. 인테리어 구상부터, 메뉴 만들고, 모객하는 것까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죠. 모르는 일, 제대로 못하는 일을 허겁지겁 수습하려다, 잘하는 일에 들이던 에너지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동대문에 물건 떼러 가면서, 커피 원두 사고, 패션 콘텐츠 만들면서, 디저트도 만들고….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지만 남는 게 하나도 없었죠.
“지나치게 여러 가지를 하는 사람은, 결국 어느 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때의 제가 딱 그랬던 거 같아요.”
Chapter 3. '신용등급 10등급'... 망해보니 비로소 보이던 것들
Monologue. 권의 독백
2018년, 결국 시원하게 망했지. 회사를 차린 지 딱 3년 만이었어. 나한테 남은 거라곤 억대의 빚밖에 없었어. 신용이 10등급까지 떨어지면 조금만 삐끗해도 바로 신용불량자행이야. 070이나 02로 시작되는 전화가 걸려오면 지금도 심장이 쥐어짜듯이 오그라들어. 무서웠어. 시도때도 없이 걸려오는 빚 독촉 전화가. 매달 갚아야 할 이자만 200만 원이 넘어갔거든. 급한 마음에 재취업까지 했는데, 두 달 만에 뛰쳐나왔어. 당장 돈이 급하건만, 그건 내키지 않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그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시니어 패션 메이크오버’라는 콘텐츠 자체엔 잘못이 없다. 어디까지나 내가 사업에 서툴렀기 때문에 망했을 뿐이다. 그럼 독하게 오답노트 써보고 다시 풀어보자. 프로젝트에 새 이름도 붙였어. 더뉴그레이(the new grey). 새로운 시니어의 레퍼런스를 만들겠다는 뜻이었지.
빚더미에 올라앉은 채 사업을 정리하고, 쉴새 없이 과외를 뛰면서도 정현씨는 꿋꿋이 ‘재창업’의 길을 택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로부터 배우기보다, 대체로 무력감을 흡수하죠. 두려운 것이 많아져 몸이 무거워지거나, 좋아하던 일의 동력을 잃기도 하고요. 정현씨는 좀 달랐다고 해요. ‘찐하게’ 망해 보니, 제대로 실패해 보니,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었대요.
“제 삶 속에서 ‘일’이 어떤 존재감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다시 보게 됐어요. 저에게 있어 ‘일의 본질’이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다른 걸 찾는 게 불가능해 보였어요.”
정현씨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남들이 다 가는 길 위에선 절대로 전력을 다해 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기꺼이 온 힘을 퍼내 달릴 수 있으려면, 달리는 그 길이 반드시 내가 만든 길이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이를 악물고 ‘내가 망한 이유’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짐’ 같은 욕심을 덜어내고, 좀 가볍게 가기로 했습니다.
캐리어 하나에 촬영 의상 쓸어 담고 민첩하게 움직였어요. 친구의 시아버지, 이모부, 큰아버지, 삼촌…. 아는 아저씨란 아저씨는 모두 동원했습니다. 메이크오버 케이스가 두 자릿수 넘기며 ‘캐스팅’에 난항을 겪자, ‘소셜 펀딩’의 힘까지 빌립니다.
현장에서 정현씨는 스타일리스트이자, 포토그래퍼였습니다. 전문 장비도 없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1,000컷을 찍었죠. 인터뷰어기도 했습니다. 촬영을 하는 내내 고객의 아버지가 살아온 삶에 대해 물었어요. 피사체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 놓는 표정 가운데에서 베스트컷들이 나왔습니다. 사진을 한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음에도, ‘사진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해요. 누구보다 인물에게 가깝게 다가갔기 때문이었죠.
‘더뉴그레이(the new grey)’ 프로젝트는 그렇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드 마케터들에게서 러브콜이 쇄도했죠. 뉴발란스, 커버낫, 로우로우, 크로커다일 레이디와 같은 패션 브랜드뿐 아니라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캐논, 기아, 신한라이프 등 다양한 기업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메이크오버 콘텐츠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이 포맷을 은근슬쩍 따라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정현씨는 언제나 ‘그러라 그래’ 태도로 일관합니다. 따라 하는 사람들은, 잠깐 건드려 보다 말 거라는 걸 그는 압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꾸준히 쌓아올리는 거 아무나 못해요. 반짝 만든 콘텐츠는 그때그때 소비되고 사라지지만, 꾸준히 쌓아올린 콘텐츠는 소비되는 게 아니라 축적돼요."
‘일단 100개만 해보자!’ 이게 정현씨의 ‘브랜딩 신조’라고 해요.
쌓다 보면 역량이 괄목할 정도로 성장하든,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지든 둘 중 한쪽으로는 꼭 뚫릴 거라고요. ‘일관성은 곧 견고함이다.’ 벽돌과 시멘트, 목재를 번갈아가며 쓴 집이 튼튼할 리 없듯 정현씨는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더뉴그레이’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 아마 여러분도 느끼실 거예요. 이들의 콘텐츠가 남다른 밀도를 자랑한다는 사실을요.
Chapter 4. 60대 방탄소년단의 인기 비결은 '나이에 맞게 입지 않는 것'
Monologue. 권의 독백
메이크오버 콘텐츠가 널리 알려지고, 협업 제안이 물 밀 듯 들어올 때도 신이 나진 않았어. 겉보기엔 잘 풀리고 있었지만, 속사정은 잔뜩 곪아 있었거든. 브랜드 체험 공간으로 만든 바버숍 체인 사업이 순식간에 기울었어. 동업자는 회삿돈을 가로채 잠적했지. 믿었던 사람한테 데인 건 처음이라 뒤통수뿐 아니라 온몸이 얼얼했어.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졌어. 최악이지. 줄줄이 잡혀있던 광고 촬영 스케줄이 한꺼번에 날아갔지. ‘이렇게 또 망하는 건가’ 싶어서 무섭더라고.
지금을 만든 순간들을 떠올렸어. 한 번 망했고 빚더미인 상태였지만 동료들에게 다시 해보자 말 못했으면 지금은 없었겠지. 그때 누군가 나를 찾아왔어. 패션 감각이 없어서인지, 모델 오디션에 자꾸 떨어진다며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했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 거기서 ‘아저씨즈’가 시작됐어.
카페에 이어 바버숍 체인까지 망하며 정현씨는 절박하게 깨달았습니다. “난 오프라인 기반 사업엔 감각이 없구나!” 남들보다 서너 배쯤 빠릿하고 민첩한 만큼 지루함도 쉽게 느끼는 성격상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오프라인 비즈니스는 초기에 투입되는 자본과 에너지의 양이 어마어마한 데 비해 성과는 바로바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놀기에 적당한 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탁월한 브랜딩 감각과 콘텐츠 기획력을 살려 ‘시니어 인플루언서’ 만들기에 도전해보기로 합니다. 고민만 하던 차에 한 시니어 모델 이정우씨가 먼저 ‘더뉴그레이’의 문을 두드립니다. ‘굴러들어온 기회’였죠. 시니어 모델 아카데미와 오디션 현장을 돌면서, 그는 알음알음 사람을 모았습니다.
‘이미 갖고 있는 강점을 더 날카롭게 벼리자.’
아저씨즈와 더뉴그레이의 브랜드 슬로건 역시 ‘Ageless(나이 경계 없음)’이죠. 지난 몇 년간 패션계의 가장 뜨거운 트렌드였던 ‘genderless’(성별 경계 없음)를 넘어 ‘세대와 나이의 경계를 아예 지워버려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입니다. 그는 세대 간 소통을 가장 쉽게 가능하게 해주는 게 ‘패션’이라고 말해요. 접촉면이 많아지면 소통의 폭도 넓어지고 자연스럽게 ‘섞이게’ 된다고요. 닉 우스터 주변에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패션은 ‘매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내 나이에 무슨’ 하고 지레 체념하는 태도를 없애주는 수단인 거죠. 저는 나이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삶에 주도권을 행사하는 멋진 어른의 레퍼런스를 만들고 싶어요."
‘더뉴그레이’의 그레이(회색)는 ‘회색지대’라는 뜻이기도 해요. 흑과 백이 섞이는 곳, 세대와 세대가 구분 없이 섞이는 지대인 것이죠. 그래서 그는 오늘도 쉴새 없이 권합니다. 골프도 좋은데 요가도 한번 해보시라고. 술도 좋지만 카페에서 플랫화이트도 한번 드셔보시라고. 네이버 밴드 대신에 틱톡을 보시라고. 매거진을 보고 직접 글을 쓰라고. 취향을 가지시라고. 흉내로 시작해도, 나중엔 정말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Epilogue. 나는야, ‘위기’를 내 손으로 기획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그에게 ‘당신에게 일의 재미란 무엇인가' 물었어요.
"저는 현장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아직도 제가 직접 촬영을 해요. 직원 써서 현장 감독 시키고 저는 데스크에 앉아 있어도 되겠죠. 그렇게 안 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이 일이 재밌으니까.
일의 재미란,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해요. 저 대신 연예인 스타일리스트가 오면 저보다 멋지게 꾸미긴 하겠죠. 하지만, 그분만의 멋을 건져올리는 건 못할 거예요. 이건 제 전매특허예요."
결국엔 재미. 쫄딱 망할 위기를 두 번씩이나 넘기면서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결국 당신만의 일터에서 맛본 ‘재미의 감각’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현재, 정현씨 인생의 슬로건은 ‘위기란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때로는 무너질 때도 있었지만 극복하며 더 강해졌으니까. 그래서 더 재미있는 일들이 생겼으니까. 그는 오늘도 자신의 ‘위기’를 자발적으로 기획합니다.
▶ 권정현 대표의 일잼 포인트 확인하기 (관련기사 ②)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42612230003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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