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인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른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것으로,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공공기관의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것이고,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구실보다 높은 직이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이 느껴진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기여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닐까 한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나그네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하고 있는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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