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쬐는 낮이 아닌 밤의 길이가 더 중요
식물의 잎이 밤의 길이를 인지해 개화
편집자주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가 격주 화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여행하는 과학쌤’이란 필명으로 활동 중인 이은경 고양일고 교사가 쉽고 재미있게 전해드립니다.
커다란 벚나무 위에 팝콘처럼 꽃송이가 톡톡 튀는 듯싶더니 어느 틈엔가 벚꽃잎이 흩날려 바닥에 깔리고 붉은 철쭉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하는 것은 너무나 짧은 순간이기 때문에 꽃놀이를 하러 먼 곳까지 찾아다니는 것이리라. 따스한 계절의 꽃놀이를 놓쳐도 기회는 또 있다. 한여름의 푸른 잎이 자리를 메운 뒤에는 국화와 코스모스가 찾아온다. 꽃들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날씨를 귀신같이 찾아 피어나는 능력이 있다.
식물이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수분(受粉)을 도와주는 곤충이 있을 때 꽃을 피우고, 태양 빛이 쨍쨍할 때 잎을 만들어 광합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종의 식물들은 낮과 밤의 길이 변화를 인식해서 1년 중 언제인지를 파악하는데, 이러한 반응을 '광주기성'이라 한다.
광주기성은 담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에 자생하는 특정한 종류의 담배는 따뜻한 계절 내내 꽃을 피우지 않고 있다가 온실에서 12월이 되면 비로소 꽃을 피운다. 이 담배의 개화 조건을 알아내고자 온도, 습도 등 다양한 변수를 조절해본 결과 빛을 비추는 시간을 줄이면 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메릴랜드의 여름은 낮의 길이가 너무 길기 때문에 꽃이 필 수 없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낮의 길이가 짧은 가을이나 겨울에 꽃이 피는 식물을 '단일식물', 늦은 봄이나 여름처럼 낮의 길이가 길 때 개화하는 식물을 '장일식물'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의 연구 결과 실제로는 낮이 아닌 밤의 길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낮 동안 잠깐씩 암실 처리를 해도 개화에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밤에는 단 몇 분만 빛을 비추어도 결과가 달라졌다. 긴 밤 중 잠깐이라도 빛이 주어지면 밤의 길이가 짧은 것으로 인식해 장일식물에서 개화가 유도되고 단일식물은 개화하지 않았다.
연속되는 밤의 길이를 인식하는 식물의 기관은 잎이다. 잎에는 특정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색소 단백질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잎을 제거한 식물은 광주기 실험에 반응하지 못하지만, 단 한 장이라도 잎을 남겨둔 식물은 밤의 길이를 인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꽃을 피운다. 잎에서 만들어낸 개화 유도 물질은 줄기를 통해서 꽃자루까지 이동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장일식물과 단일식물의 줄기를 접목시켜 기르면 양쪽 식물에서 동시에 꽃이 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여러 실험 결과에서 알 수 있듯 꽃이 피는 시기는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암실과 빛의 주기를 조절하거나 식물의 접목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가을에 피는 대표적인 꽃인 국화에 매일 밤 빛을 비추어 다음 해 봄까지 개화 시기를 늦추는 것은 화훼 산업에 널리 퍼져 있는 방법이다.
밤의 길이가 개화의 유일한 조건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식물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봄꽃 축제에 인파가 몰릴 때는 가을 벚꽃을 만들어내는 상상을 한다. 빨갛고 노란 낙엽과 함께 흰 꽃잎이 떨어지는 길. 분명 아름답겠지만 사시사철 보이는 꽃도 지금만큼 매력적일까. 짧은 순간이기에 더 눈부신 봄 길을 또박또박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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