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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살아보니... "땀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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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살아보니... "땀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입력
2022.05.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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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창 경창산업 창업주 올해로 100세
1937년 고향 밀양 떠나 도쿄 아오키제작소에 취직
6·25전쟁 후 경창상회 성공으로 사업 종잣돈 마련
1972년 현대차 협력사로 참여, '포니' 와이퍼 공급
2001년 일본 OEM 시장 , 2002년 미국 GM 수출
"정도와 정직, 화합이 기업 성공의 비결"


손기창 경창산업 명예회장은 올해로 100세를 맞았다. 손 명예회장은 “구성원들 간의 화합을 바탕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즉,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크고 작은 난관을 정면돌파해왔다”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손기창 경창산업 명예회장은 올해로 100세를 맞았다. 손 명예회장은 “구성원들 간의 화합을 바탕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즉,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크고 작은 난관을 정면돌파해왔다”고 말했다. 김민규 기자

"철아, 철아, 불쌍한 철아! 일본 가서 부디 몸 성하게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돌아와라."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이었다. 열네살 소년이 혼자서 동구길을 재게 걷고 있었다. 그날 소년은 첫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을 계획이었다. 고향의 풍경과 냄새를 가슴에 차곡차곡 개어 넣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느티나무 아래서 "석철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석철'은 소년이 어릴 적이 쓰던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불할마이', 마을 사람들은 노인을 그렇게 불렀다. 이름도, 성도, 택호도 없었다. 남의 집 머슴을 살던 남편과 하나 있던 딸은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가족도 없이 홀로 사는 노인이었다. '혹불'은 귀밑에 달린 콩알만한 혹을 뜻하는 말이었고, '할마이'는 할머니의 사투리다. 사람들은 노파에게 객귀를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동리에 감기나 몸살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혹불할마이가 호출됐다. 사람들은 혹불할마이가 눈을 부릅뜨고 욕을 뱉기 시작하면 귀신도 겁을 먹고 달아난다고 생각했다. 흉사와 허드렛일에는 어김없이 혹불할마이를 불렀으나 결혼식 같은 좋은 일에는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아이들은 혹불할마이를 보면 육두문자를 써대며 손가락질을 하기 일쑤였다. 마을에서 가장 천시받던 그 혹불할마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앞날에 복이 깃들기를 기원했다.

"철아,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잘 살아야 한다…"

소년이 일본행을 결심하기까지, 5년 남짓한 세월 동안 불행이 사태처럼 쏟아졌다. 일곱 살 되던 해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를 계기로 외가에서 소년 집에 소작을 주고 있던 땅의 절반을 다른 친척에게 줘버렸다. 외숙부를 대신해 살림을 도맡고 있던 외숙모의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살림을 일으키려고 물레방앗간을 짓다가 덜컥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물레방앗간을 지으면서 생긴 빚만 덩그러니 남았다. 집까지 팔아가며 돈을 마련하고 채무자들의 동정에 호소해 빚을 겨우 해결했으나, 도와줘도 시원찮을 외가에서 남은 땅마저 모두 빼앗아 가버렸다.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막내는 큰누님 댁에, 여동생은 외가에 부엌데기로 맡긴 후 일본으로 가는 여정을 선택한 것이었다.

1937년, 그렇게 고향을 떠났던 소년은 '혹불할마이의 다정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을 두고두고 잊지 못해' 몇 해 뒤 고향으로 돌아와 노인을 찾았다. 일본에서 사들고온 정종을 따서 부모님 무덤에 헌작한 후 남은 술을 대접할 마음이었다. 노인의 집은 스러져 폐가가 되어 있었고 이웃 주민은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소년이 일본으로 떠나던 그해였다. 무덤이라도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 했으나 "죽은 뒤에 어딘가에 갖다 버렸는데, 아무도 그 자리를 모른다"는 말만 들었다. 무덤을 알았으면 술 한잔이라도 올렸을 것이지만, 그저 하릴없이 북망을 향해 눈물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축하한다. 사장님이 너를 본사(本社)로 옮겨오라 하셨다"

혹불할마이가 그토록 가여워했던 밀양 소년은 80여년이 흐른 지금, 미국과 중국 지사를 위시해 9개 사업부, 2,000명이 넘는 임직원이 근무하는 중견기업의 창업주로 우뚝 섰다. 현대차 협력사로 자동차 구동부품 제조의 선두 기업으로 손꼽히는 경창산업 손기창(100) 명예회장의 이야기다.

손 명예회장이 쓴 성공 신화의 시작은 어린 시절 죽을 각오로 감행한 일본행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취업한 아오키제작소 제2공장은 손목시계 밴드를 생산해 세이고사라는 시계공장에 납품하는 공장으로 직원이 100명 남짓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터라 작업에 정교한 수공 작업에 금세 적응해 얼마 안 가 숙련공의 생산량을 따라잡았다. 무엇보다 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당시 조선에서 중노동자 일당이 20전에 불과했으나, 일본에서 받은 첫 일당이 65전이었다.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사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무렵, 회사 사장(아오키)이 순시를 왔다. 식민지 출신 견습공의 입장에서는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든 상대였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작업에 몰두해 있는데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오키 사장이 신입 견습생의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 다음 날, 공장장이 그를 불러서 말했다.

"축하한다. 사장님이 너를 본사(本社)로 옮겨오라 하셨다."

고향에서 짚신을 삼으면 늘 남들보다 2배를 생산했을 만큼 손재주가 좋았고, 일본에 와서 5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배우고 일했다. 손 명예회장이 묵묵히 일하는 모습에서 그런 성실성과 기세를 알아본 것이었다. 당장 월급이 40% 올랐다. 더 좋은 것은 ‘진짜’ 기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금형제작공은 가장 중요한 기술로 여겨졌는데, 바로 그 금형제작에 투입됐다. 그 후 3년 동안 야간 공업전문학교와 공장을 오가며 이론과 실무를 동시에 익혔다.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던 날, 입국 이유를 대란 일본 순사에게 "일본에 기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하고 목청껏 외쳤던 그였다. 그 말이 실현된 셈이었다.

기회가 찾아온 만큼 몸을 아끼지 않았다. 동료들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나 청소를 했고, 퇴근 후에도 문 단속, 불 단속을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아오키제작소의 젊은 사람들이 징집되어 가는 바람에 300명이 넘던 종업원이 100명으로 줄어들었으나 그 와중에도 손 명예회장은 기술에 대한 집념을 불태웠다. 1943년 3월에 향도전문공업전문학교 졸업장을 받고 일본 상무성으로부터 프레스 금형기술 1급 기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때 갓 스무살이었다. 손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내 손으로 훌륭한 자전거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 꿈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혼란의 와중에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일본의 패전 직전, 아오키 사장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무일푼의 식민지 소년에게 일본으로 오게 된 사연을 묻고 그 대답을 가만히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성과 인성 하나만 보고 식민지 청년을 자신의 사윗감이자 회사를 이을 후계자로 점찍었을 만큼 편견이 없는 사람이었다. 손 명예회장은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키 사장의 아내와 딸을 찾았다. 이후로도 일본에 출장을 갈 때마다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손기창 명예회장. 공장에서 일하던 일본인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경창산업 제공

일본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손기창 명예회장. 공장에서 일하던 일본인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경창산업 제공


손기창 명예회장 부부와 그의 큰누님, 처제부부. 뒷줄 오른쪽이 손 명예회장이다. 경창산업 제공

손기창 명예회장 부부와 그의 큰누님, 처제부부. 뒷줄 오른쪽이 손 명예회장이다. 경창산업 제공


손기창 회장의 부인인 박의경 여사의 금천초등학교 21회 졸업기념 사진. 경창산업 제공

손기창 회장의 부인인 박의경 여사의 금천초등학교 21회 졸업기념 사진. 경창산업 제공


바닥에 흩어진 사과를 주워주던 그 따뜻한 손길들

9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징집을 피한 것이나 해방 전 관부연락선에 아슬아슬하게 승선한 것 모두 행운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동안 모은 거금 2,000엔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패색이 짙어진 일제가 엔화를 마구 발행해 돈값이 폭락해버린 까닭이었다.

주저앉아 있을 틈도 없었다. 살길을 찾아 나섰다. 1946년, 대구 남산동에 셋방을 얻어서 살면서 담뱃대를 만들었다. 미군부대의 드럼을 잘라 철판으로 만든 뒤 프레스로 찍어 담뱃대를 생산했다. 기존의 수공 방식에 비해 생산성이 10배 정도 높았고 그 덕에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당시 담뱃대 생산의 본산이었던 김천 지역의 생산자들이 몰려와 항의를 했을 정도로 시장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호황도 잠시, 얼마 안 가 권련 담배가 나오면서 수요가 뚝 끊어지고 말았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

대구 중앙통에 판잣집을 짓고 작은 가게를 열었다. 가게 이름은 '경창(慶昌)상사', 경창이라는 평생의 문패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떠나고 난 뒤 소모품이 부족해졌다. '경창'은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첫 제품은 자전거 바퀴의 살을 잘라서 만든 재봉틀 바늘이었다. 품질은 조악했지만 대체품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이어 고물상에서 깡통을 가지고 와서 카바이드 등을 제작했다. 이후 소화기통을 제작해서 납품하기도 했다.

6.25 전쟁 때에는 식구들을 처가가 있는 경북 청도에 보냈다가 휴전이 체결된 후 다시 대구 판잣집으로 불러왔다. 벌어두었던 돈이 다 떨어져가는 데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고민 끝에 야시장에서 소쿠리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가 잘됐다. 소쿠리가 잘팔린다는 소문에 소쿠리 장사가 하나둘 늘어나자 마진 폭을 낮춰서 대량 판매 전략으로 돌파했다. 이 일을 통해 박리다매 전략을 몸으로 터득했다.

"아버지, 누가 우리 집을 마구 부수고 있어요!"

세월은 장마철 같았다. 잠깐 볕이 드는가 싶으면 다시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소쿠리 장사로 돈을 좀 만졌지만, 정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살던 집이 강제 철거됐다. 시장도 폐쇄됐다.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성교 제방에 면한 주택 딸린 점포를 하나 얻어서 재개했다. 방천시장 입구에서 잡화를 팔았다. 안정기로 접어들 즈음 다시 우환이 닥쳤다. 1955년, 화공약품 제조공장을 차려보자는 친구의 제의에 응해 거금을 투자했다가 2년 만에 돈을 모두 날렸다. 빈털터리가 됐다.

터전을 옮겨 새출발을 했다. 이사 간 곳은 달성동 로터리 인근의 가게였다. 당시 달성로터리에는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고향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 처음엔 과자를 팔다가 과자와 술, 과일 등을 선물 꾸러미로 만들어 팔았다. 너무 바빠서 하루 두 끼 밥에 잠도 3~4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상회를 운영하던 시절,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한번은 칠성시장 상과에서 사과 두 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오는 길에 차를 피하려다 큰길에서 넘어져 버렸다. 사과 두 상자면 하루 벌이의 대부분이었는데, 주변에 있던 꼬마들이 사과를 한두 개씩 집어들고 달아났다. 맥이 탁 풀려서 쫓아갈 힘도 없었다. 불현듯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고, 이 일을 우짜꼬!"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흩어진 사과를 주워와서 상자에 담아주었다. 그 서글픈 순간,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퍼질러 앉아 있는 그를 향한 사람들의 배려와 격려는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감동으로 남았다. 손 명예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정말 동화같은 순간이었다"면서 "그날 일이 문득 문득 떠올라 평생 타인의 크고 작은 어려움에 무관심하지 않으려 애썼다"고 고백했다.

'고구마 과자'로 사업 종잣돈 마련

남들만큼 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 손 명예회장 역시 남다른 노력으로 기회를 얻었다. 그런 그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마산 고무마 과자' 사업이었다. 당시 '마산 고구마 과자'가 큰 인기였다.

어느 날 젊은 사람 두 명이 손 명예회장을 찾아와 "마산 고구마 과자를 만드는 기술자인데, 경창에서 과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같이 일해보니 기술자란 자부심이 하늘 똥구멍을 찌를 지경이었다. 기술 보안에도 극도로 신경을 썼다.

"작업하는 동안 절대 문을 열지 마시오."

두 사람은 중요한 작업을 할 때면 문을 걸어잠궜다. 설탕과 밀가루, 그리고 화학약품의 배합비율이 나름의 극비 기술이었다. 거드름도 피우고 때로는 물량이 부족한데도 일손을 놓고 쉬기도 했다. 기술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략을 고안했다.

"어이쿠, 이를 어째? 내가 새 걸로 사올 테니 걱정하시 마시오."

약병을 일부러 바닥에 쏟아버린 후 새 것으로 사서 갖다줬다. 그리고 그날 작업 후 쓰고 남은 약품의 양을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 배합비율을 알아냈다. 그날 저녁에 기술자들에게 솔직하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두 기술자는 "열심히 하겠다"면서 꼬리를 내렸다.

"생산량을 늘릴 방법이 없을까?"

고구마 과자는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갔다. 더 많이 만들기만 하면 수익도 늘어날 것이었다. 고구마 과자를 만드는 공정 중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고구마 과자를 떡국처럼 칼로 써는 일이었다. 썰기 작업에만 예닐곱을 고용해야 했다. 시간도 많이 걸렸다. 부산하게 과자를 써는 모습을 보면서 작업 시간을 단축할 방안을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래, 저거다!"

어느 날 목화에서 씨를 뽑아내는 기계인 조면기를 보다가 불현 듯 멋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조면기 원리를 이용해 고구마 과자를 자동으로 자르는 기계를 고안한 거였다. 인건비 절감에 작업 속도가 높아진 건 물론이고 기대하지 않은 효과도 있었다. 두께가 일정하니까 과자 맛도 들죽날죽하지 않게 되었다. 맛이 표준화됐다.

"우리도 납품을 받고 싶습니다."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경창의 고구마 과자를 사가고 싶다고 했다. 말투가 대구와 다른 것 같아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마산에서 왔습니다. 마산보다 이 공장 과자가 더 맛있다고 해서요."

기술의 승리였다. 훗날, 이 자동절단기는 과자를 넘어 방앗간에서 흰 가래떡을 써는 용도로도 쓰이게 되었다. 손 명예회장은 자동절단기를 방앗간에 줄 때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았다. 돈도 벌고 사회적 기여도 한 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통장에 1,500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사업을 위한 종잣돈으로 충분했다. 이제 일본에서 품었던 '내 손으로 자전거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시킬 일만 남았다.

사업을 하면서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은 이유

기회는 갑자기 찾아왔다. 5.16 이후 박정희 의장은 각종 경제부흥정책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자전거 공업육성이 있었던 것이다. 당장 한국자전거공업협동조합 발기준비위원회를 찾아갔다.

"다른 부품은 다 배정이 됐고, 딱 하나 남긴 했는데……."

담당자가 말끝을 흐리면서 미심쩍은 얼굴로 손 명예회장을 건너다봤다. 뭐든 하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全)체인 케이스'가 남았는데, 여간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래 그런지 이걸 만들겠다는 업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손 명예회장은 오히려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담당자에게 말했다.

"제가 원하던 게 바로 그겁니다. 제가 맡겠습니다!"

어려운 기술이라면 도전할 가치가 있었고,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다른 업체와의 경쟁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발전 가능성만 놓고 보자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1961년 10월1일, 경창공업사를 설립했다. 자전거 부품을 만들기로 결심한 이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듬해 경창상회의 문을 닫고 자전거 부품에 올인했다. 그 후 기아산업 김대규 상무로부터 '삼천리자전거의 전케이스, 반케이스 그리고 자전거 짐바이와 스텐드까지 만들어 납품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사업은 활기를 띠었다. 당시는 조립공장이 따로 없었고, 도매상에서 부품을 가져가 조립을 하던 시절이었다. 도매상 직원들이 박스를 들고 경창 공장에 몰려와 프레스기 옆에 앉아 체인케이스를 쓸어담아 가져갈 정도였다. 1966년 다시 한번 더 도약했다. 침산동으로 공장을 옮겼다. 침산공장에는 전기가 들어왔다. 직원 4명이 들러붙어서 손으로 진행하던 프레스 작업을 전기로 하니 생산성이 10배로 올라왔다. 직원도 7명에서 30명으로 들었다. 1967년에 제3공단 시대를 열었다. 직원도 10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손 사장, 사업도 잘 되는데 투자받아서 공장 좀 크게 지어. 이렇게 잘나가는 경창인데 누가 노(no) 하겠어."

누군가는 그렇게 권했다. 물 들어온 김에 노 젖는다고 돈을 빌려서 사업체의 규모를 키우라는 권고였다. 그러나 모두 거절했다. 보유한 자금 한도 내에서만 사업을 확장했다. 어린 시절 겪은 혹독한 빚잔치의 영향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으려고 집을 비롯해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팔아서 돈을 마련해서 빚쟁이들 앞에 내놓았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가진 뒤 짚단에 불을 붙이더니 차용증서를 태웠다. 어린 손 명예회장은 그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사그라져가는 불을 몇 번이나 뒤적였다. 혹시나 타지 않고 남은 차용증서가 있을까 해서였다. 손끝을 파고들던 뜨거운 잿가루의 감촉이 수십 년 넘게 무모한 투자를 막아준 셈이었다.

"제가 본사에 일이 좀 있어서요"

"한국에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야."

1972년, 대한민국은 자전거에 이어 더 거대하고 정교한 기술에 도전장을 냈다. 자동차 국내 생산을 본격화한 것이었다. 시작은 1967년이었다. 그해 현대자동차(주)가 설립됐다. 당시 아시아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는 국가는 일본이 유일했고 세계로 눈을 돌려도 15개국이 전부였다. 당시 경제와 기술 수준으로 봤을 때 한국의 자동차 생산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회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경창도 자동차 사업 참여를 권유받았다. 현대자동차 개발부 부장이 경창을 찾아와 "와이퍼 암과 와이퍼 블레이드를 제작해 보는 게 어떨까요" 하고 제의했다.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자동차는 자전거와 비교해 기술 수준을 비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설비 투자비도 여간하지 않아서 실패할 경우 지금껏 쌓아온 탑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기회를 놓치기도 아까웠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경창은 끝내 자전거부품 잘 만드는 회사 정도로 머물고 말 것이다.'

1972년 자동차부품 생산에 도전했다. 1974년 우리나라 첫 자동차 '포니'가 공개됐다. 1975년이 되어서야 '한국이 자체 생산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씻겼다. 포니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1976년 1만726대를 판매해 승용차 시장점유율 43.6%를 차지했다.

경창도 새로운 시대로 돌입했다. 1978년 3공단 공장을 서대구공단으로 이전했다. 서대구공단 공장은 본사로 정했다. 동인동에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공장을 열어 길바닥에서 자전거 부품을 만들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별도의 생산공장에 본사까지 둔 어엿한 기업이 되었다. 본사란 단어만으로도 기분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 회사 자랑도 했다. 약속을 잡을 때 "일정이 있어서 어렵겠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했다.

"제가 그날 본사에 일이 좀 있었어요."

좋은 소식은 또 있었다. 현대자동차에서 경창을 '개선 시범모델'로 정했다. 미쓰비시자동차 출신 기술고문의 자문을 받아 두세 사람이 30분에서 1시간이 걸리는 프레스금형 교체를 5분만에 완료하는 기술을 익힌 덕분이었다. 협력업체 중의 '모범'으로 선발된 셈이었다. 경창을 견학한 후 생산성이 높아진 기업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믿었던 사원의 배신 "치가 떨리는 경험"

자동차 분야는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만큼 부품을 만드는 회사도 기술 발전 현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1980년대 중반 10여개에 이르던 일본의 와이퍼 제작업체가 통폐합을 단행했다. 6개 업체가 뭉쳐서 일본와이퍼블레이드(NWB)를 만들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자동차 측에서도 품질 향상을 주문했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던 참피온와이퍼와 합자를 시도했으나 현지 공장을 둘러본 후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협상이 진행되던 중에 경창이 모방해서 만들고 있던 회사의 특허기간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굳이 참피온과 손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출자금에 해약금 출혈을 각오하고 합자를 무산시켰다. 그러나 진짜 난관은 이후에 닥쳤다. 하루는 직원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회장실로 뛰어들어왔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현대차에서 우리 와이퍼를 납품받지 않겠답니다."

북미 수출 자동차에 장착한 경창 와이퍼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현대차에서는 즉시 와이퍼 납품사를 NWB로 바꾸었다. 심장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경창은 보수용이나 만드는 공장으로 몰락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연이어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두 아들에게 경창산업과 경창정공을 맡기고, 경창와이퍼는 아들 같이 믿던 직원에게 운영하도록 했다. 이것이 실수였다. 그 믿고 믿었던 직원이 5년 동안 회사를 도둑질한 것이었다.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

"경창와이퍼의 기술과 거래처를 빼돌리고, 재산까지 모두 임의로 처분했습니다. 경창와이퍼는 빈 깡통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즈음 느꼈던 막막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느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버려진 집으로 거처를 옮겼을 즈음 외숙모가 난데없이 이렇게 통고해왔던 것이다.

"너는 어려서 농사를 지을 능력이 없으니, 네 집에 소작을 준 열 마지기 전답을 모두 거두어들이겠다."

그 매정한 목소리가 다시 귀에 쟁쟁 울리는 듯했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자식은 아니지만 자식처럼 여기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보니 "치가 떨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이 났다.

회사 살리려고 수백억 개인 재산 처분

"회장님,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실의에 잠겨있을 즈음 직원이 환한 얼굴로 찾아와 말했다.

"미쯔바공업에서 와이퍼 암을 납품해 달랍니다!"

미쯔마공업은 일본에서 제일 큰 와이퍼 모듈 회사였다. 미쯔바공업이란 말에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날아간 느낌이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블레이드의 성능을 개선하는데 주력했는데, 고무의 품질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경창 고무연구소를 설립하고 학계 및 고무 전문기술자의 지도를 받았다. 1992년, 드디어 목표한 만큼의 품질을 갖춘 고무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NWB에게 빼앗긴 주문을 다시 되찾아오는 일만 남았다. 가장 어려운 관문은 현대의 초도품 검사보고서(ISIR)였다. 현대자동차에서는 ISIR 승인을 쉽게 내주지 않았다. 속절없이 몇 년이 흘렀다.

"경창와이퍼에서는 고무 품질에 어려움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은 좋아졌나요?"

어느 날, 회사를 방문한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이 문득 생각난 듯 질문을 던졌다. 현장 순시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뒤였다.

'이때다!'

1년 동안 실시한 다양한 실험 결과 보고서를 가져와서 펼쳐놓았다. 초기성능, 영구변형, 내구성, 복합환경, 소음, 떨림 등 현대자동차 규격과 국제규격, 한국화학연구소 등 공인 기관의 규격을 기준으로 실험한 자료였다.

"현재 현대차에 납품되는 고무 제품보다 품질이 우수하고 제조원가도 30% 저렴합니다."

정 회장은 얼굴에 잠시 당황한 빛이 스쳤다.

"내가 보고받고 들은 바와 다릅니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곧장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으로 돌아갔다. 공장장을 모아놓고 "당장 경창와이퍼 고무에 ISIR 승인을 내도록 검토하시오!" 하고 지시했다. 이후 ISIR 승인을 받고 현대차에 경창 고무가 적용된 와이퍼를 달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와이퍼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독일 보쉬사와 납품계약이 이루어졌다. 보쉬사 관련 매출이 40%까지 됐다. 탄탄대로가 열린 분위기였다.


김성호(왼쪽) 경창산업 노조위원장, 손기창(중앙) 경창산업 명예회장, 손일호(오른쪽) 경창산업 회장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김성호(왼쪽) 경창산업 노조위원장, 손기창(중앙) 경창산업 명예회장, 손일호(오른쪽) 경창산업 회장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민규 기자


와이퍼에서 오토 트랜스밋션으로, 도전 또 도전

그러나 경창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1997년 4월에 T/M(오토 트랜스밋션) 사업에 참여했다. 현대차에서 과거 오토 트랜스밋션의 문제점을 대폭 개선한 신세대 오토 트랜스밋션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경창이 참여 의사를 밝히자 현대차에서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전혀 다른 기술과 개념이 적용되는 부품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차 관계자의 말에 손 명예회장은 결연한 의지를 비쳤다.

"사활을 걸겠습니다. 금형, 프레스기술과 고기 장비 장치 사업에 적극 투자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결국 T/M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과 이듬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어려운 시기였다. 막 시작한 T/M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외환위기라는 쓰나미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창은 결코 호락호락한 기업이 아니었다. 경창 식솔들 모두 한 사람처럼 똘똘 뭉쳤다. 임직원들이 스스로 임금을 깎았고(30%), 30% 원가혁신과, 30% 현장 작업 개선 등의 노력으로 경주했다. 그때 손 명예회장은 현재 시가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처분해 회사에 보탰다.

위기를 넘기자 다시 새로운 장이 열렸다. 2001년 일본 OEM 시장에 진출했다. 일본 지데코사와 협력해 닛산자동차에 경창와이퍼를 공급했다. 2002년에는 미국 GM에 와이퍼 암과 블레이드를 수출했다. 60여년 전, 여비를 아끼려고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대한해협을 건너와 의심의 눈초리로 아래위를 훑어보는 일본 순사들 앞에서 "일본에 기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하고 뱃심 좋게 외치던 소년은 이제 기술로 당당하게 일본에 수출을 하는 기업의 수장이 된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꾸었던 꿈은 '자전거'였지만, 실제로 이룬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자동차였다.


2016년 10월17일 밀양시민의날 시민대상 봉사부문 수상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경창산업 제공

2016년 10월17일 밀양시민의날 시민대상 봉사부문 수상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경창산업 제공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은 없다'

손 명예회장은 2022년에 100세를 맞았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수많은 식솔을 거느린 사업가로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도(正道)와 정직'이었다.

"탈법이나 편법은 애당초 꿈도 꾸지 않았고, 시멘트가 굳은 뒤 블록을 쌓듯 내실 있게 차곡차곡 기술과 사업을 쌓아올렸습니다. 돈을 빌려 덩치를 키우는데 혈안이 되거나 돈이 된다 싶으면 상도도 내던지고 작은 기업들의 먹거리를 훔치는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회사 구성원들간의 화합도 빼놓을 수 없는 경창의 저력이자 경쟁력이라고 밝혔다. 손 명예회장은 경창산업 노조의 전신인 '경우회'를 직접 만들었다. 노조에는 전 사원이 가입했다. 이런 탄생 배경 덕분에 60년 동안 노사 간 갈등이 없었고, 쟁의 한번 일어나지 않았다. 2018년 불어닥친 위기 상황에서도 노조의 자발적인 임금 동결 등으로 무사히 큰 고비를 넘겼다. 큰 기업과 생산계약을 체결할 때도 노조위원장이 협상 테이블에 동행해 "노조도 적극 협조할 테니 믿고 맡겨달라"면서 힘을 보탤 정도로 노사 관계가 돈독하다.

손 명예회장은 "구성원들 간의 화합을 바탕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즉,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며 크고 작은 난관을 정면돌파했다"면서 "가족 같은 결속력, 정도와 내실에 충실한 경영이 60여년 동안 갖은 풍파를 이긴 동력이었다"고 고백했다.

"정세영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협력업체를 고를 때 사주의 지혜와 근면성, 후계자의 명민함을 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크게 보면 우리 세대의 성공 비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세대의 근면함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국인의 교육열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다. 태평양전쟁, 해방, 6·25전쟁, IMF 외환위기 등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모두 겪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업인들은, 그리고 대한민국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난관 앞에서 절망했다면 오늘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세계는 나날이 발전하고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지만, 곧고 정직한 마음으로 정도를 걸어간다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경창이 그렇게 해왔잖아요. 앞으로도 잘해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김성호(왼쪽) 경창산업 노조위원장과 손일호(오른쪽) 경창산업 회장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경창의 오늘과 미래를 견인하고 있는 주역들이다. 김민규 기자

김성호(왼쪽) 경창산업 노조위원장과 손일호(오른쪽) 경창산업 회장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경창의 오늘과 미래를 견인하고 있는 주역들이다. 김민규 기자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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