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장치 풀리는 핵무기의 사용 위협
우크라 상황, 판도라 상자 열 가능성
동북아, 푸틴發 핵 확산 담론 확대 우려
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 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세계의 핵 안전장치가 덜컹거리며 풀리고 있다. 냉전 이래 주된 핵 전략은 상호확증파괴(MAD)였다. 적이 선제 핵 공격을 해오면 상대 역시 보존된 핵 전력으로 전멸시키는 보복 전략이다. 공포의 균형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된 핵은 오히려 전쟁 억지의 수단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유지돼온 핵 불사용의 금기가 러시아에 의해 깨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핵전쟁의 문턱을 낮춘 장본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다. 그를 비롯한 러시아 지도부는 국가 존립의 위협이 있으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경고를 수시로 발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핵을 ‘사용 가능한 무기’로 끌어내려 세계 핵 질서를 위협하는 이유는 불리한 우크라이나 전황 때문이다. ‘긴장고조를 통한 긴장완화’ 전략 일환으로 전술핵을 사용해 일거에 승리하려는 계산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나흘 만인 2월 28일 핵 전력 부대에 특별 경계태세 강화를 지시했다. 러시아군은 핵잠수함과 미사일 발사 등 핵 공격에 대비한 훈련까지 실시했다. 당시만 해도 전투 사흘 만에 승리한다는 작전 실패와 서방 경제 제재에 대응하는 위협 카드로 해석됐다. 그러나 크렘린의 핵 사용 발언은 계속되며 그 의지도 강해지는 모습이다. 공개석상에서 핵 가방을 든 요원까지 노출시키고, 전술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최신예 이스칸데르M 미사일까지 발사했다.
최근에는 2차 대전 전승절인 9일에 맞춰 우크라이나에 전면전을 선언할 것이란 관측 속에 엄포도 계속되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핵전쟁 위협은 실재하며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경고를 반복했고, 러시아 국영TV는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유럽 주요국 수도에 대한 핵공격 시뮬레이션을 방송했다. 발트해 연안 칼리닌그라드에서 발사된 핵미사일은 런던은 202초, 파리는 200초, 베를린은 106초 만에 도달했다.
핵무기가 실제 사용된다면 이들 도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이크 마자르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핵을 사용한다면 세계는 재래식과 핵 전쟁에서 수억 명이 희생될 3차 대전에 직면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러시아의 핵 위협이 아직 수사를 넘어선 증거는 없지만 백악관이 상황 점검을 위한 타이거팀을 가동하는 등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빌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달 “러시아가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고 했다.
푸틴의 입인 크레물린 대변인은 전술핵 사용의 기준을 ‘러시아의 실질적 위협’이라고 했다. 2020년 6월 공개된 푸틴의 핵 독트린인 ‘핵 억지력 분야 국가정책 원칙’은 실질적 위협을 4가지 경우로 제시한 바 있다. 먼저 러시아 및 동맹국에 대한 탄도미사일 발사 징후와 핵무기 및 대량살상무기 공격, 러시아 국가 및 군사 주요 시설 공격,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재래식 무기공격 등이 레드라인(금지선)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현재 서방과 우크라이나의 대응은 금지선을 구성할 수도 있다. 국방연구원의 두진호 선임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고 지대함 미사일로 흑해 함대를 타격한 것은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조건을 충족한다"고 봤다. 정치 엘리트들의 핵 모험주의,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최대 수준인 위기의식, 국면 전환의 필요성을 감안할 때 판도라의 상자를 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 군사전문가 로빈 레어드는 “문제는 핵을 사용해도 적절한 미국의 대응책이 없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생화학무기, 전술핵무기를 사용하면 ‘대응’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나토 안보조약 제5조는 개별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회원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집단 대응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핵 공격으로 방사능이 나토 회원국에 유입되면 공격으로 간주하겠다는 미국 경고도 이에 근거한다. 하지만 레어드는 군사전문 매체 브레이킹디펜스 기고에서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에 대한 비례적 대응에 대한 나토 회원국 간 전략과 작전의 합의가 있는지 의문이다”고 했다. 문제의 나토 조항을 미국이 프랑스나 몬테네그로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지를 놓고도 이견이 없지 않다. 과거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편에 선 (나토의) 친구들을 저버리지 않겠다”며 슬쩍 말을 바꿔 조약 준수에 의문을 남겼다. 현실적으로 상이한 이해관계로 볼 때도 대응 수위는 회원국 간에 갈릴 수밖에 없다.
푸틴의 핵무기 사용 카드는 선언적 위협이라 해도 그 파장은 벌써 심각한 결과로 나타나 있다. 러시아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퇴출이 거론되는 것처럼 2차 대전 전승국 중심의 국제질서, 국제 비확산체제의 약화는 불가피하다. 우크라이나처럼 핵 위협에 놓인 비핵 국가들의 핵 보유 의지를 높여 국제사회 불안이 가중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안보전문가 데이비드 이그내이셔스는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이번 사태는) 미 국방부에 핵 억지력을 유지할 새로운 종말무기의 긴급한 개발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 국방부는 2023 예산요구서에서 차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센티넬, B-21 폭격기, 드론과 공동 작전이 가능한 6세대 전투기(NGAD) 개발 등을 포함시켰다.
푸틴발(發) 핵 사용 문제는 동북아에선 핵 확산 담론으로 확산되고 있다. 푸틴을 본뜬 듯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핵 사용 확대 발언은 그러잖아도 위기감이 큰 국내에서 핵무장 여론을 자극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5일 군 창건 기념 열병식에서 “국가 근본 이익 침탈 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며 핵 사용 조건을 군사·비군사적 조치까지 확장했다. 이런 논리라면 핵을 보유하지 않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위협에 노출된 것처럼 한국이 북핵에 대응하기 위해 핵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일본은 북핵 위협을 이유로 미국과의 핵공유론이, 대만은 중국 공격에 맞설 핵무장론이 제기된 상태다. 적극적인 곳이 일본인데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신뢰도 낮은 미국의 핵우산 보장 대신 나토 식으로 전술핵을 배치하는 핵공유를 다시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핵 폐기 조건으로 주권과 안전을 보장받는 부다페스트 각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 공격을 받은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본토에 핵무기를 평시 배치해 유사시 대응하면 핵우산에 기대지 않아도 억지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다.
사실 문제는 핵 사용의 문턱을 낮추는 것은 미국의 핵 전략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바이든 정부는 지난 3월 공개한 핵태세검토보고서(NPR) 요약본에서 핵 사용의 전략적 모호성을 선택했다. NPR는 미 정부가 8년 주기로 핵 정책을 검토,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미국의 핵 전략 변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번 5차 보고서에서 바이든 정부는 핵의 선제적 불사용, 바꿔 말해 미국과 동맹에 대한 핵 공격에 대응해서만 사용한다는 핵의 ‘단일 목적 사용(sole purpose)’ 원칙을 천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를 사실상 파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동맹, 협력국의 핵심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극단적 환경에서만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핵의 선제적 사용, 재래식 전쟁에서의 핵 사용의 길을 열어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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