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인권 관련 법률의 제정 과정은 단식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권 관련 법안이 논의될 때마다 어김없이 누군가 단식을 했다. 단식은 사안의 절박함을 알리고자 하는 최후의 비폭력 투쟁 방식이다. 더는 들어주지 않는 말을 거두고, 공동체라면 최소한 타인의 생명에 대한 염려는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잠자는 타인의 양심을 깨우고자 하는 행위이다.
2022년 여기 다시 인권활동가 미류와 종걸이 있다. 두 사람은 지난해 가을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30일 동안 부산시청에서 국회까지 500㎞를 걸었다. 물론 공청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국회 국민동의청원 10만 명 서명도 해봤다. 국회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결국 두 사람은 4월 11일 임시국회에서 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곡기를 끊었다. 차별금지법도 결국 누군가 목숨 걸고 단식하는 상황으로 귀결됐다. 사회적 약자에게 당연한 권리의 안전망을 법으로 보장하자는데 우리 사회는 왜 이리도 인색할까?
며칠 전 국회의원을 찾아가 성소수자들이 일상으로 경험하는 차별적 현실을 설명하고 법 제정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작업을 해 온 한 성소수자 지인을 만났다. 그는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이라고 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당사자가 피해를 경험하고 취하는 반응은 다양할 수 있다.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피해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심신이 파괴당하는 경우부터, 강인한 정신력으로 차별과 싸워 역량강화의 계기로 삼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필자가 아는 그 지인 역시 웃음과 위트가 넘치는 가장 유쾌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을 만나 성소수자들의 차별적 현실을 설명하면, 늘 극단적인 차별과 폭력에 노출된 사례를 요구받는다고 한다. 차별과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피해자다움'이라는 수행을 반복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차별 피해의 입증책임을 부당하게 피해자에게 지운다는 점이다. 차별이냐 아니냐는 가해 행위 자체의 윤리적 가치판단의 문제이지 피해 정도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둘째, 피해 입증을 '피해자다움'이라는, 오로지 외부로 드러나는 단서에 의존하면 피해자가 피해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극복한 내면의 '미덕'이 피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결과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이는 피해자에게 위선 혹은 위악을 강요하는 이차적 폭력이다. 이런 이유로 직접적인 폭력을 당한 피해자다운 피해만을 선별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일상의 차별과 인권침해는 법이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별과 인권침해는 사실 일상적으로 무심코 이뤄진다. 극단적인 폭력만 차별의 현실로 인정하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일상의 차별과 폭력을 익숙하게 견디고 침묵하도록 강제한다. 기존의 가부장적이고 비장애 중심적인 통념과 고정관념을 강화할 위험도 있다. 차별적 현실을 개선하는 법의 개입은 무엇이 차별인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그래야 종종 통념과 상식을 등에 업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차별의 가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전 국민적 각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젠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하는 방식이 아니라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차별금지의 담론 풍경이 바뀌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더 이상 '다음에'가 될 수 없다. '지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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