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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계란 흰자'가 '노른자'가 되기까지

입력
2022.05.07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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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강남 개포동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개포4단지 주공아파트의 2000년 모습. 현재는 재건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포4단지 주공아파트의 2000년 모습. 현재는 재건축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가을, 서른여섯 살 기순씨와 그의 남편은 초등학교 4학년생 아들과 네 살 딸을 데리고 서울 서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둥지를 옮겼다. 앞집 살던 창표네가 이사한 것이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창표 엄마의 집들이 초대로 강남행 버스에 오른 기순씨 부부는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를 돌아보고, 창표네 식구가 주말마다 놀러간다는 선정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순씨는 “빌딩숲 뒤에 이런 공원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감탄했고 남편은 “마침 회사가 있는 뱅뱅사거리와도 가깝다”며 이에 화답했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다시 창표네와 이웃이 되었다.

집을 보러 간 날 기순씨 부부를 사로잡은 건 베란다 앞에 펼쳐진 산이었다. 창밖 가득 펼쳐진 대모산의 붉은 단풍에 마음을 빼앗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홀린 듯 도장을 찍었다. 이후 기순씨가 누린 잠깐의 풍요는 2020년 출간된 그녀의 수필집 ‘봄날’에 다소 감상적인 문체로 기술되어 있다. ‘봄이면 소쩍새가 울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아카시아 꽃향기는 온 집안에 꿀을 쏟아부은 듯 진하고 달콤했다. 아파트단지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논과 밭이 이어진 뒷길을 걷다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과장법에는 능할지 몰라도 거짓말에는 영 소질이 없는 기순씨는 훗날 “뭐야, 내 교육 때문에 이사한 거 아니었어?”라는 딸 보라씨의 물음에 골똘해지기를 잠시, “나는 그때 8학군이 뭔지도 몰랐다”며 엄숙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리고 딸내미, 그렇게 말하기엔 네 교육의 결과가 좀 그렇지 않냐.”

남편과 연애 시절, 첫 키스는 물론 첫 포옹조차 쉽게 허락지 않았던 기순씨에게 그곳은 진정한 의미의 첫 집이었다. 지금도 드라마 ‘마당 깊은 집’에 나오는 길남이네 집, 두 개의 방 사이에 판자를 대어 네 개로 늘린 좁아터진 셋방을 자신의 신혼집에 빗대어 말하길 좋아하는 기순씨는 대문이 아닌 쪽문으로 드나들었던 원남동 다세대주택이나 저녁이면 연탄 냄새가 진동했던 내발산동 빌라에는 결코 내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순정을 개포동 주공아파트에 바쳤다. 그 사랑은 남편과 실로 오랜만에 손을 잡고 산책한 선정릉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고, 부동산 직원이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홀로 서 있던 가을 베란다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사 첫날, 결혼 후 처음으로 뜨거운 물을 받은 욕조에 몸을 담근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사랑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기순씨 일가가 개포주공 4단지에서 6단지로, 다시 7단지로 이사하는 동안 그녀의 사랑은 한층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지만 그래도 선정릉이나 대모산이나 욕조가 싫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81년 7월 확정된 개포지구 도시개발 기본계획 조감도. 강남구 개포동 일대 개포지구는 택지개발과 토지구획정리사업 방식이 혼용되어 개발된 특수한 사례로 서민주택건설을 위한 주택용지를 비롯하여 상업용지, 공원, 학교, 녹지 등으로 개발, 이용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81년 7월 확정된 개포지구 도시개발 기본계획 조감도. 강남구 개포동 일대 개포지구는 택지개발과 토지구획정리사업 방식이 혼용되어 개발된 특수한 사례로 서민주택건설을 위한 주택용지를 비롯하여 상업용지, 공원, 학교, 녹지 등으로 개발, 이용되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반대로 어려서부터 온수의 세례를 받고 자란 보라씨에게 개포동은 그저 낡고 불편한 동네였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구식 아파트 단지는 불법 주차된 차들로 빼곡했고, 이른 아침 수도꼭지에서는 잊을 만하면 누런 녹물이 쏟아져 나왔다. 대학에 가고 나서는 집 앞 놀이터에서 이따금 담배를 피웠는데, 지나가던 이웃들이 엄마한테 일러바치는 통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파트 옆에 아파트, 그 옆에 또 아파트인 동네에서 어른들의 눈을 피해 자유롭게 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코엑스나 압구정까지 나가야 했다. 그렇게 놀다가 늦은 밤 다시 버스를 타고 집 앞에 내리면 이상하게도 공기 중에 시골 냄새가 났다. 보라씨는 웬만해선 택시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택시가 혼잡한 시내를 지나 양재천에 접어들 때면 나이 지긋한 기사들이 “아가씨 그거 알아? 옛날에는 여기가 죄다 논두렁이었어” 하고 중요한 사실을 일러주듯 말했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배밭, 뻘밭이라 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보라씨는 “아아, 네” 하고 일부러 시큰둥한 태도를 취했다.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 시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품은 송곳 같은 함의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취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그녀는 지금에 와서야 생각한다. 운 좋게 싼값에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장만한, 부모 잘 만난 팔자 좋은 아가씨.

얼마 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던 팔자 좋은 보라씨는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극중 창희 여자 친구가 서울을 계란 노른자에, 경기도를 계란 흰자에 비유하는 장면에서 문득 엄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재건축의 거센 바람에 길 건너 아파트 불이 하나 둘 꺼질 무렵, 네 식구가 살던 집에 홀로 남은 기순씨는 개포동을 떠나 경기도민이 되었다. 기순씨와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던 보라씨는 “개포동도 한때는 강남의 계란 흰자 아니었냐”며 웃었다. 그러자 기순씨는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답게 “그렇지, 강남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친 동네였지”라고 맞받아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틴 그 30년이 돌이켜보니 계란 흰자가 노른자로 변하는 시기였다고.

기순씨는 책에서 “수백 마리의 딱따구리가 동시에 나무둥치를 쪼는 것처럼 창문이 들썩거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산이 흔들리고 터널이 뚫렸다. 터널은 커다란 입을 벌려 자동차를 삼키고 토해냈다. 소쩍새는 자취를 감췄고 산등성이를 넘어오던 아카시아 향기는 자동차 매연에 휩쓸려 사라졌다.’ 산 아래로 8차선 도로가 뚫리고, 인도가 갓길로 변하면서 그 길에 늘어서있던 전통시장이 강제 철거됐다. 10층 베란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기순씨는 분을 이기지 못한 상인 하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친 수박이 인도를 붉게 물들이던 모습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곁에서 나이 어린 새댁이 갓난아이를 안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가엾고 애처로웠다고.

1990년대 강남 풍경이 등장하는 영화 '벌새'의 한 장면. KMDB 제공

1990년대 강남 풍경이 등장하는 영화 '벌새'의 한 장면. KMDB 제공


작가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작용한 것일까. 보라씨는 소설을 쓰면서 개포동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강남의 탄생',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같은 책을 읽으며 한강 이남의 미개발 불모지였던 강남이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새삼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양재천변에 나룻배가 돌아다녔다”는 택시기사들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동네에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실을 다 알았던 건 애초에 개포동이 주거 단지 내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근린주거 개념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라는 것도 책을 통해 배웠다.

보라씨가 내부자로서 체험한 개포동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소환한 것은 영화 '벌새'였다. 그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꼬마전구가 하나둘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집집마다 훌라후프가 놓여 있던 복도식 아파트, 아파트 상가 안에 있던 서예 학원, 재건축 문제를 두고 각자의 입장에서 반목하는 어른들. 간밤 꾸었던 꿈처럼 잊고 있던 기억들이 뒤늦게 하나둘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벌새'를 만든 김보라 감독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에 이름까지 같았다. 1980년대 한글 이름 짓기가 유행하던 시대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동네에서 1990년대를 통과한 아파트 키즈임을 확신한 보라씨는 일면식도 없는 그의 인터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감독이 어린 시절 대치동의 정서를 언급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당시 학교에서 가정조사를 하면 아빠 직업, 사는 평수, 무슨 자동차 타는지를 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개포동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보라씨에게도 익숙한 이야기였다. 대치동 사는 아이들은 개포동 사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개포 7단지 사는 아이들은 개포 4단지 사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저층 아파트 사는 아이들은 임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을 무시하는 그 야만적인 시각은 돌이켜보면 그들 각자의 강남을 공고히 하려는 이기의 소산이었다. 모든 것이 동네가 계란 흰자에서 노른자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동네를 떠나는 사람도 생겼다. 보라씨는 그 시절 엄마 친구들의 명칭을 이따금 새로 익혀야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대치동 우성아파트에 살았던 ‘우성 아줌마’가 ‘수서 아줌마’로, 건너편 미도아파트에 살았던 ‘미도 아줌마’가 ‘분당 아줌마’로 바뀌었던 것을 말이다.

2018년 9월 개포주공4단지 재건축 사업을 위해 철거가 진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8년 9월 개포주공4단지 재건축 사업을 위해 철거가 진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처럼 개포동이 강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변해가는 동안 보라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취재 과정에서 자신이 강남8학군 출신임을 강조하는 사람을 자주 만났다. 그럴 때면 그녀 역시 “실은 저도 은광여고 출신”이라고 주저 없이 밝히곤 했다. 그렇게 말하면 이후 취재가 한결 수월하게 풀렸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어릴 적 자주 갔던 맥도널드 1호점이나 은마상가 떡볶이 등을 언급하며 자신은 보라씨와 다른 압구정동, 대치동 출신임을 강조하는 인간도 없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들에게 상전벽해의 동네로 통했던 개포동은 이제 보라씨에게도 상전벽해의 동네가 되었다. 나무를 베어낸 땅에 최신식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동안 한편에서는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들이 아파트를 추억하는 활동을 벌인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파트 재건축으로 고향을 잃은 도시의 실향민들이 자신과 같은 세월 뿌리내리고 살았던 나무들 중 몇 그루만이라도 보존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뉴스에 달리는 댓글의 분위기는 대부분 좋지 않다. 재개발 혜택을 노리고 ‘알박기’한 주민들의 배부른 투정에 불과하다는 입장이 주를 이룬다. 그런 댓글을 볼 때면 보라씨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자신이 살았던 동네, 고향에 대한 나의 어떤 입장이 누군가에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상기하며 눈을 크게 뜬다. 그러면서도 그 기사에 ‘좋아요’를 누르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때 그 새댁은 지금 뭐할까?” 통화가 끝날 무렵, 보라씨는 걱정스럽게 묻는다. 그러자 기순씨는 뜻밖의 놀라운 사연을 들려준다. 20년 후 우연히 일원동에서 그 새댁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동안 남편과 함께 열심히 수박을 팔아 강남에 빌딩을 올렸더라는, 안심이 되기도, 조금은 배가 아프기도 한 이야기다. 보라씨는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을 떠올리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수박을 팔던 새댁이 강남에 빌딩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름이었다.”

강보라(소설가ㆍ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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