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감자같이 동그란 뿌리가 서너 달 죽은 듯이 조용히 있다가 솔잎 한 올 같은 이파리를 슬쩍 밀어 올린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흙이 마르지 않도록 물만 잘 챙겨주면 알뿌리 식물은 때를 잊지 않고 찾아온다. 고개를 내밀고 나면 금방 쑥쑥 자라 화분을 가득 채우고 백합과 나리꽃을 피워 내는 것을 보면 제때를 어찌 저리 잘 아는지 참 신기하기만 하다.
작년 봄에는 삐죽삐죽 올라오는 새순 하나의 끄트머리를 실수로 날려버렸다. 곁을 정리해 주려 하다가 손에서 미끌린 가윗날이 순 하나의 끝을 스쳐버린 것이다. 자고 나면 마법의 나무처럼 잘 자라는지라 ‘겨우 1㎜’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 순은 거기서 멈춰버렸다. 겨우가 아닌 ‘바로 1㎜’, 그곳이 생장점이었던 것이다. 생장점이란 식물의 생장을 눈에 띄게 하고 있는 부분으로 ‘자람점’이라고도 한다. 생물의 성장 상태에는 ‘자람새’라는 말을 쓴다.
우리는 성장하는 것에 ‘자라다’는 말을 붙여 쓴다. 그런데 ‘자라다’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세포 증식으로 몸집이 커지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나는 어릴 때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와 같이 성숙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민주 의식이 자라다’처럼 높아지는 역량에 대해서도 쓴다. 늘어나고, 피어나고, 높아지는 여러 가능성이 담긴 말인 만큼, ‘자라는 호박에 말뚝 박기’는 심술궂고 잔혹한 짓을 이르는 말이 된다. 또한, 힘이나 능력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고,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자라다’도 있다. 그래서 ‘못 자라다’가 ‘모자라다’의 어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란다는 말에는 키가 자라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정신과 능력도 들어있다. 그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는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도 정작 자란다는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했을까?
어린이를 응원하는 5월이다. 동심에 힘을 실어주려는 문화는 범세계적으로 있다. 계산하는 줄에서도 엄마의 식료품보다는 아이의 초콜릿을 먼저 계산해 주는 직원,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 꺼내 아이에게 건네주는 사장님을 종종 만난다. 그때 그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에 그처럼 미소가 지어질까? 죽은 듯 딱딱한 나뭇가지에 이가 돋듯 파릇파릇 잎이 난다. 이 이파리처럼 투명하고 연약한 어린이들이 있어야 사회라는 나무가 푸르름으로 뒤덮일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자랄 때까지 상처 입지 않도록, 어린이들의 ‘자람점’은 이 사회가 함께 지켜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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