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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는 중동의 축복일까 재앙일까

입력
2022.05.10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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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사태로 석유 중요성 재부각
서구열강, 중동 석유 차지하려 오래전부터 짬짜미
중동 산유국들도 OPEC 결성해 맞서...영향력 증대

편집자주

오늘날 세계경제는 우리 몸의 핏줄처럼 하나로 연결돼 있습니다. 지구촌 각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시사, 인물 등이 ‘나비효과’가 되어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인문학과 경영, 디자인, 사회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경제학자의 눈으로 세계 곳곳을 살펴보려는 이유입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에 한 번씩 화요일 연재합니다.


8일(현지시간) 오후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의 한 주유소에서 주유하기 위한 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러시아군의 석유 인프라 공격 및 전쟁 장기화로 우크라이나 전역에 연료 부족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8일(현지시간) 오후 우크라이나 르비우 시내의 한 주유소에서 주유하기 위한 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러시아군의 석유 인프라 공격 및 전쟁 장기화로 우크라이나 전역에 연료 부족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37>중동 석유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역사

최근 러시아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전 세계인들인 또 한번 그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 있다. 바로 화석연료로 대변되는 원유와 천연가스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는 동참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급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미국과 쿼드 등으로 강력한 연대로 묶여 있는 인도 역시 러시아로부터의 자원 수급을 단절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 서구의 역사를 돌아보면, 석유에 의존한 혹은 석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행보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중동’ 지역이 아닌가 싶다.

수하일 알 마즈로이 아랍에미리트(UAE) 에너지부 장관이 3월 28일(현지시간) 국제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가 두바이에서 주최한 글로벌 에너지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에너지 시장에는 러시아산 석유가 필요하며, 어떤 생산국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러시아 등이 추가된 OPEC플러스(OPEC+)는 함께 있어야 하고, 정치가 OPEC+를 분란시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수하일 알 마즈로이 아랍에미리트(UAE) 에너지부 장관이 3월 28일(현지시간) 국제 싱크탱크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가 두바이에서 주최한 글로벌 에너지 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그는 에너지 시장에는 러시아산 석유가 필요하며, 어떤 생산국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러시아 등이 추가된 OPEC플러스(OPEC+)는 함께 있어야 하고, 정치가 OPEC+를 분란시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중동 석유 손 아래 두려고 한 서구 열강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많은 국가들은 중동의 여러 산유국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중동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하지만 독일 편에 선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 중동 지역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은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지역에서 서로 상이한 조약들을 체결하며 이후 지속적으로 중동 지역의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먼저 1917년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중동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하지만 밸푸어 선언은 불과 2년 전인 1915년 맥마흔 선언(McMahon Declartion)과 전혀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맥마흔 선언은 해당 지역에 아랍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선언이 이들 지역에 독립국가를 지지하는 내용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인 영국과 프랑스 간의 세력 범위를 정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하기도 한다.

중동 지역에 미국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차 세계대전 때부터이다. 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미국은 자국에서 생산된 원유만으로도 석유 수요를 충분히 소화했다. 이 때문에 해외 산유국과의 관계 설정 내지 원유 가격 추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1940년대 들어 미국은 해외 석유 산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1941년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중동 산유국들의 중요성을 확인한다. 전쟁의 승패는 원활한 석유 수급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방국인 영국, 프랑스는 자체적인 원유 수급이 어려운 국가들이며, 독일, 소련 등 견제 대상 국가들의 경우 국방력 유지를 위해 원활한 원유 수급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중동의 원유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10%도 채 안되는 수준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의 중요성이 고조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1944년 미국과 영국은 영미석유협약(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을 체결한다. 사우디의 석유는 미국이 갖고, 페르시아 지역(이란)의 석유는 영국이,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함께 개발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때 탄생한 정유회사들이 사우디 아람코와 BP의 전신들이다. 영미석유협약 이후 영국과 미국은 각각 4명씩 총 8명으로 구성된 국제석유위원회(International Pertroleum Commission)를 구성한다. 이 기구는 각국의 권장 생산량, 시장 조절 방안 등을 협의하게 된다.


중동 산유국들, 서구에 맞서려 OPEC 결성

이처럼 영국과 프랑스 혹은 미국과 영국 등이 서로 경쟁적인 관계를 설정하기보다는 상호 호혜적인 관계 속에서 석유 수급 체계를 구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유 산업은 대표적으로 담합을 통해 거둘 수 있는 이익이 크게 늘어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원유 시장에서는 생산량 조절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격이 급등하거나 급락하기 쉽다. 그것은 정유 산업이 대규모 시설투자가 요구되는 장치 산업이기 때문이다. 원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시추, 해상 플랫폼 건설 등 막대한 자금이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원유 생산자 간의 상호 합의가 없을 경우, 유가 상승기에는 너도 나도 추가적인 설비 투자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잉 투자가 이루어지기 쉽다. 그리고 한번 투자가 이루어진 설비들의 경우 유가가 하락하더라도 가동을 멈추기보다는 계속해서 가동하는 것이 손실을 줄이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원유 생산량은 수요량을 초과하기 쉬워지고, 이는 유가 폭락과 수많은 정유 업체의 도산을 야기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많은 정유업체와 석유 패권을 장악한 나라들은 상호 간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선 중동의 산유국가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석유수출국기구인 OPEC의 탄생은 서구 정유회사들이 알려준 교훈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정유 산업에 있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담합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서구 정유회사들이 알려준 것이다. OPEC은 1960년 9월 바그다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5개국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이들 5개 국가들은 서구 국가 정유회사들의 부당한 수익배분 구조에 반기를 들고자 OPEC을 결성한다.

하지만 서구 열강국가들의 조율 아래 전개되는 정유산업에 중동 국가들이 처음으로 반기를 든 것은 3차 중동전쟁인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아랍 국가들은 석유를 무기화하여 서방 국가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67년 6월 아랍 국가들은 석유 수출 중단을 전격 결의한다.

하지만 당시 아랍 국가들의 석유 통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사우디가 석유 감산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우디 석유장관인 야마니는 당시 중동 지역이 석유를 무기화하는 것은 오히려 아랍 지역의 경제적 손실만 가져올 뿐이라며, 석유 무기화에 회의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에 놓여 있던 이란 역시 석유 생산을 계속했고, 중동 이외의 베네수엘라와 인도네시아 등은 이 기회를 틈타 석유 수요를 더욱 늘리면서 아랍 지역의 석유 생산 중단의 효과를 경감시켰다.

3D 프린터로 만든 석유 시추 기계가 2020년 OPEC 회의장에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3D 프린터로 만든 석유 시추 기계가 2020년 OPEC 회의장에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석유 수요 높아지면서 영향력 커진 중동 산유국들

이처럼 산유국들 사이의 입장 차이로 1960년대 후반 중동 지역의 첫 석유 무기화 시도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전 세계 석유 수요가 1970년대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 아랍 석유의 중요성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 196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은 자국 석유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석유 수입 물량을 제한해 왔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자국의 석유 생산시설을 100% 가동하지 않더라도 자체 생산능력을 통해 충분히 필요한 석유를 조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비축마저 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전 세계적으로 석유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아도는 석유 물량으로 인해 중동지역의 공급 중단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1970년대 들어서 공급 중단은 바로 공급 공백과 유가 폭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랍 지역은 석유 질서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할 수 있는 무기를 갖게 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서구 정유회사와 산유국 사이의 수익배분 원칙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사람이 생겼으니 다름 아닌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이다. 1969년부터 2011년까지 42년간 집권한 카다피는 미국계 정유회사인 옥시덴탈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미국 정유회사가 가진 모든 자산을 국유화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옥시덴탈은 카다피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를 지켜본 여타 중동 국가들인 이란, 사우디 등도 연쇄적으로 그간의 부당한 수익분배 원칙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들을 이어간다.

이러한 중동 국가들의 노력으로 인해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스탠더드 오일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뉴욕 △쉘 △BP △스탠더드 오일 캘리포니아 △텍사코△ 걸프오일 등 영미권 7개 정유회사를 중심으로 전개된 석유산업을 중동을 비롯한 여타 산유국 정유회사들인 △사우디 아람코 △이란 국영석유회사 △러시아 국영 천연가스회사와 이 밖에 △브라질 △중국 △베네수엘라 △말레이시아 국영석유회사 등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 열거한 내용을 종합할 때, 현재 중동 지역은 또 한번의 기회 내지 위기에 놓인 듯하다. 전 세계 에너지 수급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탈의존 기조는 중동 지역의 중요성과 이들 국가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러시아의 에너지 수급에서 탈피하려는 노력과 함께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대두되고 있는 신재생에너지의 부상이 맞물릴 경우 중동 지역에 대한 중요도는 더 낮아질 수도 있다.

박정호 명지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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