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딸 의혹 계기 국제학교 가보니>
'획일적 입시 벗어나자' 취지 설립됐지만
고액 학비에 부잣집 자녀들 '귀족 학교'로
학생·학부모 불안감 이용 '스펙' 종용 만연
대입 다가오면 "논문 등 스펙 하나라도 더"
원어민 교사도 학생들 '사교육 의존' 인식
"학교 커리큘럼만 잘 활용해도… 안타까워"
학교 전체를 둘러싼 높은 담장 탓인지, 13일 인천 연수구 채드윅 송도국제학교는 점심시간까지 조용했다. 운동장에서 하키 연습하는 학생들 모습이 담장과 나무들 사이로 이따금 보일 뿐이었다. 오후 3시가 가까워지자 교문 앞으로 학부모 차량들이 늘어섰고,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면서 학교 주변은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며칠간 교내 활동으로 지방 캠핑을 다녀왔다는 10학년 학생들은 이날 양손 가득 짐을 든 채 가장 먼저 학교를 빠져나왔다. 전교생 10명 중 3명꼴이라는 외국인 학생들도 이따금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자녀를 기다리던 한 학부모는 "외국인 학생 대다수가 교사, 주재원, 대사관 직원들 자녀"라며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외국 국적 아이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외국식 교육과정 이수를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 이른바 '국제학교'가 한국에 자리 잡은 지 10년이 넘었다. 현재 국내엔 6곳의 인가된 국제학교가 있고, 모두 유치원부터 고교까지 영어로 통합해 운영하고 있다. 4곳이 제주(노스런던컬리지에이트스쿨(NLCS) 제주, 브랭섬홀 아시아(BHA), 세인트존스베리 아카데미(SJA) 제주, 한국국제학교(KSI) 제주)에, 나머지 2곳이 인천 송도(채드윅 송도 국제학교)와 대구(대구국제학교)에 위치해 있다. 국제학교 졸업생들은 교육부 인가에 따라 검정고시 없이도 국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지만, 대부분 해외대학 진학이 목표라 '보험용'에 불과하다.
국제학교는 △조기 유학 인구 흡수 △획일화된 입시 교육을 벗어난 국제 인재 양성 △외국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 여건 제공을 설립 취지로 삼았다. 그러나 연간 3,000만~4,000만 원대에 달하는 학비에 대기업 간부·자산가·연예인·고소득 전문직 등 부잣집 아들딸들이 주로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귀족 학교'로 불리기 시작했고 "해외대학 입시에 맞춰 한국식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채드윅 재학생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딸의 '스펙' 관련 의혹이 불거지면서, 궤도를 벗어난 교육 방식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대입 직전 받는 컨설팅... 11학년이 '피크타임'
획일적인 입시 교육을 피하려고 국제학교를 선택했다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외부 컨설팅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날 채드윅 정문 앞에서 만난 10학년 학부모는 "교내에도 '컬리지 카운슬러(입시지도 교사)'가 있지만 형식적 수준이라, 외부 스펙은 학부모가 따로 알아보고 준비한다"며 "송도엔 제주처럼 유학원들이 밀집돼 있지 않아 대부분 압구정으로 간다"고 말했다. 이 학부모는 그러면서 "논문을 작성해 학술대회에 나가는 일은 흔하다"며 "암기식 한국 교육보다는 훨씬 창의적 활동 아니냐"고 반문했다.
국제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은 해외대학 입시를 위한 컨설팅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11학년을 꼽았다. 채드윅 10학년 A(17)군은 "최근 상담차 강남 유학원을 갔는데, 컨설팅을 받고자 하는 명단이 꽉 차 있었다"고 전했다. A군과 같은 학년인 B(16)양도 "코로나 이후 SAT(미국대학입학자격시험) 응시 장소가 다수 폐쇄되면서 SAT 점수가 선택 제출 자료가 된 데다, 내신(GPA) 성적이 높은 학생이 워낙 많아져 컨설팅 역할이 전보다 커진 것 같다"고 전했다.
수천만 원짜리 급조 스펙 종용하는 국내 유학원
국제학교 졸업을 앞두고 받는 대학입학 컨설팅은 학교 활동을 에세이(자기소개서)에 잘 녹이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을 넘어 '급조된 스펙'을 쏟아붓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자녀들을 해외대학에 진학시킨 뒤 강남에서 10년째 유학원을 운영 중인 이모(68)씨는 유학원에서 내세우는 수천만 원짜리 비교과 스펙들로 △논문 급조 및 대필 △미국 대학 여름캠프 참가 △해외 인턴십 △미국 상하원 의원 만남 주선 등을 꼽았다.
이씨는 원서 제출이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스펙을 추가하라는 유학원의 권고는 상술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이씨는 "국내 유학원이 주도하는 대학 캠프는 탐방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여러 대학에 직접 문의해 본 결과 '캠프 활동은 어떤 입학 혜택도 주지 않는다'는 답을 받았다"며 "편법으로 쓴 논문도 대학 입학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학술지 논문 공저'는 해외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특목고와 자사고 학생들 사이에선 오래된 '상품' 중 하나다. 국제고 졸업 후 미국 명문사립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는 C(24)씨는 "고3때 컨설팅업체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스펙이 교수와의 논문 공저였다"며 "미국 대학교수를 연결해 주겠다고 할 만큼 네트워크가 탄탄한 곳이었는데, 컨설팅 비용이 2,000만 원에 달해 포기했다"고 전했다.
'밀착 관리' 원하는 학부모들 성향도 한몫
전문가들은 비정상적인 사교육이 성행하는 이유로 보딩스쿨(조기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다니는 대입 예비학교) 대신 국제학교를 선택한 학부모들의 불안 심리가 유학원 상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영희 미국공인교육플래너는 "국제학교가 생기기 전엔 아이를 보딩스쿨에 보내 놓고도 불안감에 미국까지 건너가 고액 과외 '뺑뺑이'를 돌려 현지 교사들도 황당해했다"며 "국제학교가 국내에 생긴 뒤로는 학부모들의 밀착 관리가 쉬워졌고, 유학원들이 상술을 부릴 여지도 더 커졌다"고 밝혔다.
실제로 제주 국제학교 밀집지역 5분 거리엔 학생들을 위한 학원 단지가 형성돼 있다. 교습 과목은 '고등 GPA' '중등 GPA' 등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위한 '보습 학원'이 다수였다. 보습 학원의 한 강사는 "해외대학 진학을 위해선 내신(GPA)이 가장 중요한데,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한국어로 다시 수업하고 예상 문제와 답안을 함께 준비한다"며 "서술형 시험이 많기 때문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들도 학원에서 제공한다"고 말했다. 학원가엔 해외대학 진학을 위한 SAT 수업, 리서치, 글쓰기(writing)부터 미술과 코딩학원도 있었다.
2015년 노스런던컬리지에이트스쿨(NLCS) 제주를 졸업하고 영국 대학에 진학한 김모(25)씨는 "내가 국제학교 다닐 때도 IB(영국식 교육 커리큘럼) 내신 과목과 관련한 고액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더 심해졌다"며 "보딩스쿨로 간 학생들도 유학원 관리를 받지만, 국제학교 학생들만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학원 컨설팅과 개인 과외에 의존하는 일부 학생들 실태는 국제학교 교사들도 인식하고 있다. 채드윅 관계자는 "수업시간에 이해가 안 가도 질문하지 않고, 과외나 학원 수업으로 해결해 온다는 걸 외국인 교사들도 이미 알고 있다"며 "학생들 관심 분야를 알려주면 잘 지도해 줄 텐데, 학교 커리큘럼과 인프라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상위권 대학엔 안 통한다" 알아도 돈 쓰는 이유
인천과 제주에서 만난 국제학교 학생들은 한동훈 후보자 청문회를 앞두고 불거진 편법 논문 의혹에 대해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학생들은 "편법으로 쓴 논문이나 단기에 급조된 스펙보단 3, 4년간 꾸준히해 온 교내외 활동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공계 진학을 희망하면 논문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부실 논문을 학술지에 올리거나 대필받는 행위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컨설팅업체 도움 없이 미국 대학에 진학한 채드윅 졸업반 학생은 "대입을 앞둔 11학년에는 학교 교육과정에 '올인'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논문을 쓴다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같이 인식하고 있는데도 급조된 스펙 상품이 꾸준히 팔리는 이유는 뭘까. NLCS 11학년 학부모는 "더 좋은 스펙을 쌓기 위한 '디딤돌' 스펙이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단번에 좋은 장학금과 수상 실적을 쌓는 게 어렵기 때문에 유명하지 않은 저널에 일단 글이라도 올려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인트존스베리 아카데미(SJA) 제주 11학년 학생도 "자기소개서에 남다른 활동을 적어야 한다는 부담은 큰 데 준비할 시간은 부족하다"며 "부모님이 학원 선생님과 상담해 스펙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유학원에선 '부실 스펙'으로 아이비리그(미국 동부의 유명 사립대) 등 최상위권 대학엔 합격할 수 없지만, 중하위권 대학은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며 학부모들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강남의 한 유학원 관계자는 "아이비리그에 못 가면 한국 명문대를 보내겠다는 국제학교 학부모는 한 명도 없다"며 "경제력이 충분한 이들에게 해외 대학은 필수라서, 중구난방 스펙으로 갈 수 있는 대학들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